세계테마기행 촬영 에피소드

EPISODE-11_맨손으로 화산에 오르다!

아하누가 2024. 7. 10. 00:16


이번 <세계테마기행>촬영에서 가장 어렵고 중요한 촬영은 화산 등정이었다. 화산도 살아서 활동하는 활화산이다. 필리핀 루손섬 남부에 있는 마욘산이라는 화산으로, 공중에서 봤을 때 정확한 원추형의 모양을 띄고 있어서 아름답기로 유명한 활화산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거야 구경하는 사람들의 생각이고, 직접 올라가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볼 때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 일정에 대비해서 나름 체력관리도 하고 컨디션 조절도 했지만 막상 눈앞에서 자연의 웅장함을 보니 다리가 저절로 달달 떨렸다. 답사 다녀온 스탭은 별 거 아니라며, 슬리퍼 신고도 올라갈 수 있다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그런 말도 안되는 허세는 오히려 심장만 더 쪼그라들게 했다. 

모든 촬영일정은 이 화산 등정에 맞추어져 있었다. 체력적으로 여유가 있을 촬영 초반에 해치우자는 계획이었다. 

 

 

화산 등정이 시작됐다. 사진속 작게 보이는 일행중 노란바지 입은 사람이 나다. 

 

일단 화산이 있는 지방정부의 등정 허가를 받았다. 말이 허가지, 사고가 나도 행정부에서는 책임 안진다는 각서를 쓰는 것뿐이다. 경험이 풍부한 현지인 산악 가이드 한 명, 그리고 조리와 짐꾼을 담당할 스탭 두 명. 그렇게 현지인 스탭 3명과 조우하고 등정을 시작했다. 촬영스탭은 담당 피디와 카메라 맨만 동행한다. 이런 상황엔 피디도 여지없이 카메라를 들고 강행한다. 

 

 


산으로 오르는 정상은 비교적 평화로운 농가가 있고 본격적으로 환산지역이 시작되면 엄청나게 울창한 밀림이 눈앞에 나타난다. 이 밀림을 4시간 가량 통과해야 하고, 이후 화산에서 흘러나온 용암이 굳어서 만들어진 길을 따라 또 4시간을 올라가야 하는 코스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 무렵 시작한 등정은 밀림 지역으로 들어가자마자 일몰과 관계없이 사방이 어두워졌다. 처음 겪는 밀림 속 행군이다. 사방은 뾰쪽한 식물로 가득하고 고르지 못한 바닥과 울퉁불퉁 튀어나온 나뭇가지 때문에 일렬로 행진하는 일행 중 맨 앞 가이드의 지시에 군소리 없이 따라야 한다. 조금만 실수해도 큰 사고로 이어진다. 

 

 

 

 


해가 바로 기울었고 작은 랜턴 아니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같은 어둠을 뚫고 산행이 이어진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촬영 스탭들은 나를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일거수 일투족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전편에서도 이런 얘기를 했지만 정말 카메라맨이야말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극한 직업이고 또한 가장 용감한 직업임에 틀림없다. 

산행이 이어지자 걷기도 힘들어졌는데 피디는 계속해서 코멘트를 요구한다. 이것도 미칠 노릇이다. 정말 이런 환경에서 인터뷰까지 해야 한다니 자꾸 욕이 압밖으로 터져나왔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카메라가 두대씩이나 따라다니니 꼼짝없이 따라해야 할 일. 

 

중간중간 인터뷰를 해가며 거친 밀림속을 두 시간 남짓 걸으니 희한하게도 작은 공터가 나타났다. 공터라곤 절대로 나타나지 않을 것 같은 울창한 밀림 속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이곳을 이곳에서는 캠프 1(Camp 1)이라고 불렀다. 한 시간 정도 더 올라가면 캠프2가 있다고 했다. 

캠프1에 자리잡았다. 지친 발걸음을 잠시 멈췄고 준비해온 음식도 먹어야 했다. 짐꾼 겸 요리사로 따라온 현지 가이드들은 요리를 시작했고 지칠대로 지친 나는 아무데나 쓰러져 아무 것도 보이지도 않는 하늘만 쳐다봤다. 별이 많다. 사방은 조용하고 가끔씩 우는 풀벌레 소리는 조용한 도서관에서 울리는 핸드폰 알람 소리처럼 크게 들려왔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텐트를 치고 휴식을 취했다. 비가 온 뒤 산행이라 온몸은 다 젖었고, 옷을 갈아입을만큼의 여유도 없어 텐트 속에서 시간만 기다렸다. 새벽 4시경 출발한다니 잠을 잔다는 건 의미가 없을 듯했다. 

 

 

캠프1에 도착. 꿀맛같은 휴식을 취하고 있다.  

 

 

다시 시간이 흘러 정상을 향해 캠프1을 떠났다. 아직도 한두 시간 밀림을 통과해야 하는 과정이 남았다. 앞장 선 현지 가이드의 익숙한 칼놀림이 풀숲을 헤쳤고, 거친 정글은 점점 그 밀도가 엷어졌다. 동이 터오를 무렵 밀림 지역이 끝났다. 연기를 뿜고 있는 화산의 정상이 한층 가까와졌다. 이제부터는 용암이 굳어져 길이 되어버린 용암길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밀림 지역이 끝나고 용암으로 이루어진 길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밀림만 지나면 쉽다는 스탭의 말은 사실과 달랐다. 바닥은 미끄럽고, 지형의 특성상 잘못 넘어져도 무려 100여 미터를 굴러 내려가는 구조였다. 밀림 속에서의 사고는 찰과상 등 피를 보는 상처가 난다면 여긴 최소한 골절이다. 더욱이 위험했던 것은 낙석이다. 살면서 낙석이란 게 얼마나 끔찍하고 공포스러운지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였다. 간혹 산 위에서 돌이 굴어 내려오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서로 서로 '락락락(Rock Rock Rock)을 외치며 몸을 피해야 했고, 옆으로 떨어져 굴러내려가는 돌을 보면 간담이 서늘해졌다. 

앞서 가던 가이드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얘기를 시작했다. 그해 봄에 벨기에 등반객 하나가 낙석에 맞아서 죽었는데, 머리에 쓰고 있는 헬멧이 완전히 박살났고 머리가 쪼개져 뇌가 사방으로 여기저기 튀어나간 채 죽었다는 얘기를 표정하나 바뀌지 않고 자연스럽게 떠들고 있었다. 이 나쁜 녀석. 그런 얘기는 혼자만 알고 있으면 되지 굳이 이 상황에서 할게 뭐람!

 

 

용암이 굳어진 길을 올라가는 일도 밀림을 통과하는 것만큼 고역이다.  

 

 

그렇게 넘어지고 일어나고 두팔로 바닥을 짚고 오르다가 또 손발 다 써가며 엉금엉금 기어가고....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더디에 올라가던 행군에 문제가 발생했다. 조금씩 가깝게 다가오던 구름이 정상을 다 덮어버렸다. 바람은 세지고 시계는 20미터가 채 안될 정도로 어두워졌다. 무엇보다도 어디서 굴러올 지 모르는 낙석에 대한 위험이 제일 큰 걱정이었다. 피디는 당연히 강행을 제안했고, 나야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싶었지만 그래도 아들놈도 보는 방송이라는 어처구니없는 허세로 원치않는 강행 제안에 찬성했다. 하지만 정작 제일 두려움에 떨고 있는 건 베테랑 가이드. 이곳에서 태어나 살았고 이곳을 누구보다 잘 아는 가이드는 행군에 난색을 표했다. 그저 아무 것도 모른 채 패기와 허세만 가득한 촬영팀만 기고만장하고 있었을 뿐이다. 사실 이미 이 지점까지 오기전에 짐꾼 한 사람은 울먹이는 얼굴로 등정을 포기하고 안전한 지역을 찾아 숨어들어가 있었다. 

 

 

무엇보다 낙석이 제일 무섭다. 돌이 내려오는 것만 봐도 등골이 오싹해진다.  

 

 

그렇게 등정은 멈췄다. 산 정상이 약 2300~2400미터의 높이인데, 약 1900미터 지점에서 일정을 스톱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더 올라가서 정상을 정복하겠다는 의지는 내게도 충분히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내려올 일이 걱정이었다. 여기서 일몰을 만나면 아마도 낙석에 맞아 죽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실패로 끝난 화산 일정은 그대로 방영됐고, 티비로 볼 때 아쉬운 생각이 들곤 했다. 한편으로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보니 얼마나 위험한 일정이었는지 등골이 오싹해지기도 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목소리 더빙을 위해 스튜디오를 찾았을 때 편집을 담당한 조연출이 나를 보더니 심각하게 물었다. 

 

"선생님 웬 욕을 그리 많이 하셨어요. 다 편집했잖아요"

"내가? 그랬다고?"

 

편집을 위해 촬영된 영상을 본 조연출 말에 따르니 화산을 기어오르며 내가 그렇게 욕을 많이 하더란다. 잘 기억은 안났지만 그럴만도 했으리라 싶었다. 

화산 등정은 이렇게 끝났다. 하지만 그 뒤로 남아 있는 일정들도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2015. 9.

필리핀 루손섬 남부 마욘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