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비 프로그램을 촬영하다보면 반드시 발생하는 난감한 상황이 있다.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제작진과의 갈등이다. 제작진은 제작진대로 제작의 의도가 있을테고, 출연자는 출연자대로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만들어주기 바라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것은 기본적으로 다른 생각에서 발생하는 경우니 서로 합의와 절충으로 해결할 수 있다. 문제는 당장 카메라가 돌아가는 현실에서 원지 않은 촬영을 해야 할 경우다. 기분도 좋지 않고, 하필이면 컨디션도 좋지 않은데 이상한 행동을 요구한다. 춤을 추라든가 또는 열심히 일하는 인부들 사이에 끼어 함께 일을 하라는 등의 주문이다. 그것이 좋은 장면이 될 것 같지 않다는 건 아마추어 방송인인 나의 생각일 뿐이고, 방송 제작진의 입장에서는 어떤 해프닝이 생기더라도 영상에 담지 않으면 방송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논리다.
당연히 제작진의 논리가 맞다. 방송을 하겠다면 영상에 담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해야 하는 업무다.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하기 싫을 때도 있다. 이럴 때는 서로 난감해진다. 피곤해진다. 찍어봐야 좋은 표정 안나오지만, 그렇다고 아무 것도 안찍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화산지역에 있는 한 시골마을을 찾았을 때, 동네 어귀에서 아이들이 농구를 하고 있었다. 제작진은 바로 뛰어들어서 아이들과 함께 놀아줄 것을 요구했다. 마침 그날은 오전부터 액티브한 촬영을 계속 했고 마침 해가 저무는 시간이라 몸이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옷도 젖었고, 제발 얼른 촬영을 마치고 옷이라고 벗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방송이란 게 그런가. 좋은 방면이 나오면 반드시 영상에 담아야 하고, 그 영상 안에서 출연자는 무언가 행위를 해야 하는 의무가 있으니까.
아이들하고 나름 재밌게 놀아줬다. 농구도 열심히 하고 나름 개그 본능도 발휘하며 몸개그도 좀 했고.... 불행히도 그런 장면들은 방송에 니오지 않았으니 이 또한 참 난감한 일이다.
벌써 해가 지기 시작했고 사방은 금방 어두워졌는데도 촬영은 끝날 줄 몰랐다. 이미 지쳐있으니 뭐든지 하기 싫은 상황이었다. 그래도 제작진은 촬영을 감행했고, 거부할 명분이 없는 나는 충실하게 지시에 따라야 했다. 또 아이들과 놀아주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아이들과 그리 잘 놀아주는 편이 아니지만 카메라가 돌아가는 한 달리 방법이 없다. 세상에서 가장 잘 놀아주는 모습으로 아이들을 대해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뭘까?
이런 질문은 질문 자체로 어리석은 질문이겠지만 이 과정에서 나만의 정답을 찾았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카메라다.
카메라만 돌아가면 지치든 피곤하든 또는 의지가 있든 없든 최선을 다하게 된다. 평소 이런 종류으 ㅣ다큐멘터리를 보거나 혹은 리포터가 등장하는 방송을 볼 때 성의없어 보이는 리포터의 행동은 눈쌀을 찌뿌리게 했으니, 내가 그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의지가 강하게 일어나게 된다. 카메라의 마술이다. 아픈 사람도 벌떡 일어나게 하고 지친 사람도 힘이 나게 한다.
촬영을 모두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해서 이 생각엔 변화가 없다.
아직도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하곤 한다.
"세상에서 뭐가 제일 무서운 것 같아?"
그리고 항상 혼자만의 정답을 말하곤 한다.
"카메라야. 카메라! 그게 돌아가면 꼼짝없이 할 수밖에 없거든....."
그러면서도 가끔 카메라의 주인공이 되었던 시간이 그리워지기도 하니 카메라가 주는 매력은 살면서 느끼는 가장 큰 매력인 듯싶다.
2015. 9
EBS 세계테마기행 촬영중. 필리핀 루손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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