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칼럼-인저리타임

박종환 감독 다시보기

아하누가 2024. 7. 8. 00:58



<이 글의 작성시기는 대략 2004년경이다>

 

 

요즘 프로축구리그에 박종환 감독이 이끄는 대구FC의 선전이 돋보이자 

박종환 감독의 재평가를 논하는 글들이 많이 등장한다. 

아마 우리나라 축구 역사상 감독으로서 

이렇게도 상반된 찬반 양론이 많이 나오는 감독도 보기 드물 것이다. 

그러한 박종환 감독을 다시 보기 위해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박감독에 관한 몇 가지 기억을 더듬어 본다. 

 

 * * *

 

우선 박종환이라는 이름 석자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가장 큰 사건은 

1983년 멕시코에서 있었던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의 4강 신화일 것이다. 

당시 이미 아시아 예선을 탈락한 후였지만 

이어진 북한 팀의 심판 폭행사건으로 인해 북한이 4년간 국제경기 출장정지라는 

중징계를 당하게 되고, 이 사건으로로 한국팀이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에 북한을 대신하여 출전하게 된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이 대회에서 박감독이 이끈 청소년팀은 

파죽지세를 올리며 승승장구하여 전국민을 열광에 빠지게 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온 국민이 열광했던 이유는 단지 성적이 좋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동안 보아오지 못한 축구, 

그러나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스타일의 축구를 보게 되었다는 기쁨 때문이다. 

쉴 새 없이 달리는 호쾌함과 패스로 일관된 완벽한 조직력, 

거기에 우리 정서에 딱 어울리는 강인한 정신력으로 무장했으니 

국민들도 열광할 만했다. 

흠잡을 데 없는 대회를 치르고 나니 온 국민은 박감독의 매력에 빠지게 된다. 

정해원, 변병주, 최순호, 정용환, 이태호 등 

기라성 같은 성인대표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온 국민은 이들의 이름보다 신연호, 김종부, 노인우, 장정, 유병옥을 외쳤다. 

이전에도 축구 경기는 온 국민의 관심을 집중했지만 대부분 단발경기였고, 

적잖은 기간동안 온 국민을 열광시켰던 사례로는 첫 번째이기도 했다. 

물론 급격하게 퍼져나간 매스미디어의 영향도 컸다. 

 

이런 영광의 여세를 몰아 1984년 4월. 

박종환 감독은 국가대표팀의 감독이 되어 싱가폴에서 열린 

올림픽 최종예선에 참가하게 된다. 

당시엔 23세 이하의 나이 제한이 없었으므로 실질적인 국가대표팀의 경기였다. 

최종전에서 맞붙은 대 사우디전. 

반드시 이 경기에 이겨야 본선에 나갈 수 있는 한국팀은 

심판의 애매한 판정 등으로 4:5로 패하며 4년 뒤를 기약하게 된다. 

나이가 조금 드신 축구팬들은 이 경기를 기억할 것이다. 

한국 축구사는 물론 아시아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명승부 한판이 바로 이 경기다. 

이후 박종환 감독은 1986년, 87년, 88년 코리아컵(당시 대통령배 축구대회) 

감독으로 팀을 이끌다 1998년 대회 준결승에서 체코에게 진 뒤 

돌연 국가대표팀 감독을 사퇴했다. 

이후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감독, 1995년 코리아컵 감독, 

1996년 아시안컵 감독 등을 역임한다. 

바로 이 문제의 1996년 대회에서 박종환 감독의 한국팀은 

이란에게 2:6의 참패를 함으로써 

더 이상 박종환 감독을 국가대표팀에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박종환 감독이 국가대표팀을 이끌었던 전력이다.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잠시 여기서 박종환 감독의 국가대표 입성 배경을 살펴봐야 한다. 

주로 박감독의 국가대표팀 감독 선임은 협회보다는 팬들의 요구에 의해 이뤄졌다. 

1983년 멕시코 선전 이후 올림픽 감독이 그랬고,

1993년부터 1995년까지 프로축구리그를 3연패하자 

달리 대안이 없이 대표팀 감독이 된 96년 아시안게임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팬들의 기대와는 달리 만족할 만한 성적은 낸 것도 아니었고 

박감독에게 기대하는 특유의 축구 스타일도 보여지지 않았다. 

다만 88년 감독을 사퇴할 당시 박감독이 한 말이 아직 인상에 남는다. 

 

"사람을 나무에 올렸으면 최소한 밑에서 흔들지는 말아야 한다."

 

당시엔 언론에 의지하여 축구계 소식을 접했으나 

요즘처럼 인터넷이 발달한 시점에서는 이 말의 뜻을 이해하기 쉽다. 

현재의 축구계의 관행으로 미루어 

당시에는 선수선발도 감독 역량으로 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박종환 감독이 축구감독으로서 역량을 인정받은 경우는 

딱 2번이라 봐도 되겠다. 

1983년 멕시코 청소년대회와 

1993년이후 프로축구 리그에서 3연패를 이끈 일화천마 시절의 박감독이다. 

그럼 이 두 번의 성공에서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박감독을 기억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그 이후로 10년도 더 지난 지금의 판단은 어떨까?

 

우선 박감독의 축구는 체력과 정신력을 앞세운 축구다. 

바로 이 대목이 많은 팬들의 극단적 양극화된 평가를 가져온 부분이다. 

전술과 테크닉보다는 정신력과 체력을 강조하다보니 창의력이 없어지고 

이른바 '무식한' 축구가 된다는 것이 비판하는 사람들의 주요 내용이었다. 

더욱이 정신력과 체력을 강조하는 축구다 보니 

훈련과정에서 잦았던 구타 및 욕설이 보도되면서 이러한 훈련방식에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어떨까? 

설령 지나친 훈련과 욕설 및 구타가 있었다면 분명 좋은 방식이 아니다. 

그러나 이 대목은 시대적 상황으로 이해해야 한다. 

지금의 이 시대에 그렇게 훈련한다면 남아나는 선수가 없을 테지만 

당시에는 그것도 한가지 방법이었을 수 있겠지만 

그 대목이 사실이라면 그리 변명할 여지는 없겠다. 

그러나 전술적인 면에서 현재의 축구가 그 당시의 축구보다 발전했다고 할 수 있을까? 

당시 박감독의 축구는 체력과 정신력만 강조한다고 비아냥거림을 받았지만 

현재의 뻥축구와 비교할 때 전술적으로도 딱히 부족할 게 없는 듯하다. 

물론 시대적 추세로 인해 전술의 변화도 상당히 있었지만 

그것은 단지 시간의 흐름이 바꾼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정신력과 체력만 강조한다는 점만은 아니었고, 

오히려 체력과 정신력 부분은 

현재의 시각과 세계적 추세에서도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보인다. 

 

두 번째 박감독 축구의 특징은 무명의 선수들로 거둔 커다란 성과다. 

1988년 일화축구팀이 창립되면서 박종환 감독은 신생팀의 지휘봉을 잡는다. 

그러나 구단의 열악한 지원과 신생팀의 한계로 인해 

창단 직후에는 좋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 뒤 1991년 프로축구리그에서 준우승을 하더니 

이어 1992년부터 1995년까지 일화천마(현 성남 일화)팀은 

앞으로도 나오기 힘든 프로축구 3연패의 놀라운 성적을 거둔다. 

프로축구 3연패라는 놀라운 성과만 놓고 보면 

상당한 선수들이 팀을 이끌었을 것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더욱 놀랍다. 

국가대표팀 선수 찾아보기도 힘든 멤버로 일군 성적이다. 

당시 주전 멤버로 뛰었던 선수중 고정운, 신태용, 이상윤 등이 

그나마 대표팀 명단에 오르내렸다. 

3연패의 실질적 주역인 수비진중 이종화, 인익수 선수가 

94년 미국 월드컵 명단에 이름이 올랐으나 한 경기도 그라운드에 서지 않은 채 돌아왔다. 

기억나는 몇 선수 중 최고의 선수가 바로 안익수다. 

정말 무명의 선수가 팀을 잘 이끌었다. 

이 선수가 94년 월드컵 국가대표에 뽑혔을 때는 

대기만성의 모델을 보는 것 같아 반가웠지만 

결국 한 경기도 뛰지 못함에 더욱 섭섭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받아주는 팀이 없어 전경으로 군복무를 마친 하성준 선수. 

꾸준한 노력으로 팀내 고액 연봉자에 이르나 국가대표 등 화려한 경력은 없다. 

따라서 지금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터프한 전담수비수 박광현, 

작은 키에 다부진 드리블로 멋진 돌파를 보여준 이기범, 

경기 때마다 조기축구회에서 플랭카드를 들고와 응원하던 유봉기, 

신인상을 받았지만 기억에 오래 남지 못한 조우석, 

고정운과 공격을 이끌던 김이주 등 

무명 선수거나 무명에 가까운 선수들을 조련하고 잘 이끌어 

다시 나오기 힘든 프로축구 3연패를 이끌어냈다. 

본인 역시 선수로는 큰 이름을 날리지 못한 무명 선수였으니 

이 대목에선 마치 드라마틱한 요소마저 깃들여 있다. 

여기에는 무명선수를 조련하는 능력도 탁월했지만 

이와 병행하여 선수를 보는 눈도 좋았다. 

특히 외국인 선수 영입을 보면 그 능력이 더욱 돋보인다. 

이게 박감독의 세 번째 특징이며 상반된 평가가 오가는 부분이다. 

 

1992년 일화 (현 성남)팀의 가장 큰 고민은 골키퍼였다. 

당시 김영호 선수와 외국인 마르셀이란 선수가 골문을 지켰는데 이게 골칫거리였다. 

대부분의 경기에서 골문을 책임진 루마니아 출신 골키퍼 마르셀은 

근육질의 단단한 체격에 머리를 박박 밀어버린, 

전 프랑스 대표팀 골키퍼 바흐테즈와 흡사한 외모를 갖추고 있었으나 

불행히도 실력은 전혀 비슷하지 않았다. 

공격으로 얻은 득점을 지키지 못하고 쉽게 실점하여 경기 분위기를 망치곤 했다. 

이 때 러시아에서 수입한 불세출의 골키퍼가 있으니 

그가 바로 신의손(당시 이름 사리체프)이다. 

러시아에서 야신 클럽에도 가입한 경력이 있던 이 선수는 

한국 축구판을 싹 바꾸어버렸다. 

정확한 판단력과 놀라운 순발력, 경기 흐름을 놓치지 않는 선방은 

일화팀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되었고 

이후 그 힘의 바탕은 프로축구 3연패를 이루기에 훌륭한 밑거름이 되었다. 

(이 영향으로 한국프로축구는 골키퍼 보호 규칙이 만들어지고 

이 규칙에 따라 현재까지도 프로축구는 외국인 골키퍼를 출전시킬 수 없다.)

근데 그게 사리체프 뿐만 아니다. 

오래된 축구팬이라면 기억하실 지도 모르겠지만 이종화, 안익수 등과 함께 

철벽 수비진을 이끌던 러시아 출신 '겐나디'라는 수비수가 있었다. 

이 선수를 기억한다면 당시 프로축구에 상당히 애정이 많은 팬이다. 

이 선수 또한 기량이 출중하여 거의 모든 상대의 중앙공격이 이 선수에게 막혔다. 

수비수가 화려하다고 해야 얼마나 화려하겠냐만 

이 선수의 수비를 보자면 '영악'과 '듬직' 그 자체였다. 

 

이 대목에서 박감독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공격지상주의인 척하는 박감독이 든든한 수비수와 골키퍼를 앞세워 

축구를 재미없게 만들었다고 혹평한다. 

사실 1992년까지의 일화 팀은 공격 일변도의 팀이었다. 

그러나 3연패를 하던 1993년부터는 수비의 비중이 늘었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 좋은 성적을 거뒀다. 

그러나 공격을 안한 것이 아니라 수비의 중요성을 다시 인식한 것이고 

또 수비만 한 것이 아니라 수비가 강해진 것이다. 

요즘의 관점으로 봐도 그 점은 별로 비판받을 부분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축구는 공격력으로 득점하지만 이기는 건 수비로 이긴다는 사실에 모두 동감할 테니까.

 

마지막 하나, 팬들의 평가가 엇갈리는 부분은 

박감독이 맡은 팀은 지독한 감독 중심의 팀이라는 점이다. 

감독의 색깔이 너무 강하여 선수들을 편애하고 

팀컬러가 밝지 않다는 게 박감독이 싫은 이유다. 

이 부분에선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의 극명한 대립을 볼 수 있다. 

잠시 한 경기를 돌아보자.

 

1992년경 어느 여름. 동대문운동장에서 유공(현재 부천)과 경기가 있었다. 

경기 시작하자마자 지나치다 싶은 일화팀의 공격 일변도가 무려 4골을 얻어냈다. 

아직 전반이 채 끝나지 않았을 때였다. 

관중은 흥분했고 운동장은 열광하고 있었다. 

근데 문제는 4득점이나 올린 팀인 일화 선수들은 이후 공을 잡으면 

어찌된 일인지 벤취로 눈을 돌렸다. 

계속 공격을 해야 하는지 수비로 전환해야 하는지 감독만 쳐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인상적인 것은 박감독이 계속 손짓으로 공격을 지시했고 

선수들은 계속 어정쩡한 동작으로 경기를 계속했던 장면이 기억난다. 

결국 후반에 유공이 2점을 만회하여 4:2로 끝났지만 

그 경기에서 보여준 박감독의 공격지시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대립한다. 

박감독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런 공격지향적인 면과 감독의 카리스마를 좋아하고, 

박감독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선수들이 일일이 감독 눈치를 봐야하는 독선적 지도 방식을 싫어한다. 

오죽하면 박감독을 싫어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일화 선수들은 득점을 하면 감독에게 달려가고 

관중들은 득점한 선수보다 감독 이름을 연호한다'라고 비아냥거렸을까. 

아마도 이 대목이 박감독의 상반된 평가가 나오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박감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선 

당시에 이러한 평가에 딱히 대응할 만한 논리가 없었다. 

그러나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축구를 대하는 시각에 변화가 생기니 이제는 달리 보인다. 

지난 2002년 월드컵의 한국팀이 그러지 않았나. 

감독의 독선과 카리스마가 심하고 

감독 색깔이 팀 컬러에 지나치게 강한 영향을 주는 것이 

어쩌면 요즘의 세계축구에 있어서 더 자연스러운 것 같다. 

이 부분에서는 히딩크와 박종환 감독이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다. 

다만 한 사람은 축구협회로부터 역사상 가장 좋은 대접을 받았고 

또 한사람은 가장 홀대를 받았을 뿐이다. 

모든 일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평가된다. 

삼국지의 등장인물도 아직도 평가가 엇갈리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은 일들이야 오죽할까. 

 

최근에 있었던 대구 FC의 선전으로 박종환 감독 역시 새로운 평가를 받는 중이다. 

그리고 아직도 평가가 진행되는 한복판에 서있는 중이다. 

조금만 더 지나면 정당한 평가가 나올 것이다. 

'정확한' 평가가 아닌 '정당한' 평가라는 점을 한번 더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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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글을 쓴 나는 박종환 감독 향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모든 시각이 박감독의 옹호 쪽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시인한다. 

따라서 다른 반론이나 반박 또한 자연스러울 것이다. 

오히려 그보다는 글 중에 등장한 전적과 결과 등이 오로지 기억에 의존한 것이므로 

오류가 많을 것이 더 우려된다. 

축구협회는 이런 자세한 기록을 잘 보존하고 쉽게 찾을 수 있게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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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0년이 지나 현재 박종환 감독은 성남FC(구 성남일화) 감독으로 복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