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생각없이 집안을 둘러보니 매우 고급스러워 보이는 하모니카 한개가 눈에 띈다.
어린이와 청소년 음악 교육에 관련된 사업을 하는 친구가 준 것인데
별로 그 용도를 발휘하지 못하고 단지 집안의 장식물로서,
또는 아이들의 관상용 교육도구로서만 존재를 확인하고 있는 불행한 하모니카다.
이 나이에 직접 하모니카를 불자니 조금 궁상맞아 보이고,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이 불기엔 하모니카는 아직 어려운 듯싶다.
아니, 컴퓨터 게임은 좋아해도 하모니카를 불어보려고 노력은 하지 않는게 현실이다.
사무실에 앉아 있다 문득 그 하모니카가 떠올라 인터넷으로 하모니카 홀더를 주문했다.
하모니카 홀더란 오래전 세상을 떠난 가수 김광석이 목에 걸고
키타치면서 노래도 부르던 바로 그것이다.
그나마 그렇게 부는 게 두손을 모으고 처량하게 부는 것보다
혹시라도 남이 본다면 조금 나아보이거나 조금 '있어보이는' 상황일 거라는 생각이다.
주문한 홀더가 도착했고 포장을 푸니 작은 아들이 궁금한 듯 옆에 와서 구경하고 있다.
"그게 뭔데요?"
"이거? 하모니카 부는거야"
"하모니카가 뭔데요?"
"......?"
하모니카를 모르나?
아직 초등학교에 다니지 않는 유치원생 의연이는 내년에 초등학교에 간다.
초등학교에 간들 교육의 차원에서 가르칠 뿐이지
하모니카 실습은 초등학교 음악과정에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큰 녀석 후연이도 알기만 할 뿐 부는 방법은 전혀 모른다.
"이거 어떻게 소리 나요?"
"그냥 입에 대고 후~ 하고 불면돼."
소리가 나는 게 재미있었던지 녀석은 계속 하모니카를 불어댄다.
몇 번 불다보니 악기에 대한 구조에 숙달되었는지 높은 음과 낮은 음을 구별할 줄도 알고
숨을 들여마셔도 소리가 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던 모양이다.
정해진 음정은 없고 박자 또한 없이
단지 소리내는 일이 마냥 즐거운 의연이의 하모니카 연주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자기 자식이라 그런지 도무지 음악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소리의 파장이
제법 아름다운 하모니카 연주로 들려오고 있다.
잘한다고 부추기니 녀석은 정말 자신이 잘하는 줄 알고 한껏 기교를 부린다.
장난기가 잔뜩 섞인 표정과 더불어.
"그렇게 하지 말고 그냥 아까처럼 불기만 해."
이렇게도 저렇게도 불어보는 의연이의 하모니카 소리는
나름대로 상당히 정감있는 연주곡으로,
또는 상당한 음악적 재능을 가진 음악가가 만든, 고난이도의 불협화음이 포함된
현대음악의 한 부분 처럼 들린다.
* * *
아이 둘을 키우면서 악기 하나쯤은 잘 연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부모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가졌을 바람이다.
그 악기가 상대적으로 우아해보이는 피아노나 바이올린이어도 좋고
그것이 아니라도 자신이 애착을 가지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면
그것으로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악기와 음악의 개념은 충분하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생각은 부모의 생각하고는 매우 달라
음악을 통해 자신의 즐거움에 만족을 느끼기엔 아직 너무나 높은 벽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인 큰 아들 후연이도 매일 다니는 피아노 학원엔 흥미가 없는지
실력이 늘 그대로고, 학교에서 배우는 리코더에도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어린 시절 기억을 더듬자니 내가 4학년 무렵 리코더를 참 잘 불어서
음악시간이면 내가 앞에 나가서
그날 배울 음악을 먼저 부르곤 했었던 기억이 아직 새로운데,
내 생각처럼 자식들의 취향이 움직여지진 않는 모양이다.
잠시 생각에 젖어있는 동안에도 작은 아들 의연이는 계속 하모니카를 불고 있다.
나름대로 소리가 재미있고
자신의 의도에 따라 소리의 높낮이와 강약이 조절되는데 흥미를 느낀 듯싶다.
하모니카를 의연이 눈에 자주 띄는데 놓아두고
가끔씩 가르쳐주면서 분위기를 끌어가면
어쩌면 의연이도 흥미를 느끼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아들 두 녀석 중 한 녀석은 내가 잘하는 키타반주에 맞춰
뭔가 한가지 작품이 만들어질 것만 같다.
아직도 계속 울리는 녀석의 하모니카 소리를 들으니 뭔가 희망이 보였다.
그날 저녁 TV 코미디 프로그램에 어느 개그맨이 하모니카를 들고 나왔다.
낮에 있었던 일도 있고 해서 얼른 의연이를 불렀다.
"의연아, 저 아저씨 하모니카 분다. 아까 의연이가 불었던 거 알지? 하모니카?"
의연이도 하모니카란 말과 그 소리가 이미 익숙했던지
매우 흥미로운 TV에 눈을 고정했다.
뭔가 이미 다져진 상당한 실력을 갖춘 개그맨은
현란한 테크닉으로 나로서는 상상도 못할 멋진 음악을 연주했으며
함께 보던 의연이도 매우 즐거워했다.
어렸을 때는 조그만 영향도 크게 미치는 법이니까
이런 방송은 특히 오늘의 일에 있어
의연이와 하모니카의 관계를 더욱 친밀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희망도 잠시, TV속의 개그맨의 기교는 그것만이 아니었던지
다음 순간부터 개그맨은 하모니카를 더욱 현란한 테크닉으로 연주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개그맨은 하모니카를 코에 대고 콧바람으로 연주하고 있었다.
재밌다는 듯 깔깔 대며 웃던 의연이가 갑자기 주변을 둘러보며 하모니카를 찾았다.
얼른 숨겼다.
그리고 하모니카라도 잘 가르쳐보겠다는 나의 앙증맞은 상상은
TV의 개그만과 함께 기억밖 휴지통으로 숨어 들어가고 있었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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