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투명인간 쎄요?"
언제나 그렇듯 후연이는 새로운 형태의 캐릭터가 등장하면
그 주인공의 공격 및 제어 능력으로 그 특징을 가늠하려 한다.
이번엔 투명인간이다.
드디어 이 녀석이 공상과학 영화와 소설이 낳은 명품, 투명인간에 대해 알기 시작했다.
투명인간이라는 존재는 생활에서도 다양하게 쓰일 수 있는 뛰어난 응용력을 가졌으므로
누구나 한번쯤 상상하게 되는 고성능 캐릭터다.
녀석이 묻는 '세다'의 기준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몇 캐릭터의 공격 능력을 넘어서야 하고
생각치 못했던 가공할 방법의 무기나 공격 방법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 역시 녀석에게 장단을 맞추기 위해
엄청, 조금, 진짜, 대빵 등 다양한 부사를 동원하며 그 정도를 표현하곤 했다.
특히 어휘력의 한계로 인해 적절한 수식어를 찾지 못했을 경우에는
억양과 목소리 톤, 그리고 호들갑스러운 몸동작으로 그 정도를 구분하도록 했다.
매사를 공격지향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결코 좋다고 할 수 없으나
후연이는 아직 올바른 생각의 틀을 잡아주는 것보다
상상의 폭을 넓히는 것이 더 중요한 초등학교 저학년이다.
"글쎄...."
보통의 경우라면 아들에게 이런 대답을 할 때 조금도 망설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경우는 조금 다르다.
투명인간이라면 내게도 작은 기억이 하나 있다.
몇년전 투명인간의 허와 실에 대해 혼자 끄적거린 얘기가 있다.
그 얘기에 따르면 투명인간은 매우 실속이 없는 놈이다.
어른들 기준으로 볼 때 경제적으로 수익이 따르지 않는다.
경제적 이익을 얻으려면 투명보자기나 투명 가방 같은 부가 장치를 동반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결국 도둑질 정도가 수익구조의 대부분이다.
따라서 어른들은 실속없는 투명인간보다는
공상과학이 낳은 또 하나의 히트작, 타임머신을 더 선호한다.
또한 투명인간의 결정적 핸디캡은 길 걷다가 차에 치일 수도 있다는 점인데
이것은 너무나 치명적인 단점이다.
유일한 장점이 치명적 단점으로 공존하는 슬픈 특징이다.
이렇듯 나름대로 투명인간에 대해 부정적이라는 결론을 내린 상태인데
이에 대해 후연이가 물으니 선뜻 대답을 할 수 없다.
"투명인간은 약해!"
"네? 왜 약한데요???"
남에게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이 약할 리가 없다고 생각한 후연이는
크지도 않는 눈을 크게 떠가며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이 녀석에게 경제적 비효율을 설명해봐야 알아들을 리도 없고
공사장에서 떨어진 벽돌에 맞을 확률이
보통 사람 보다 100배가 크다고 해도 못알아 들을 것이다.
딱히 설명할 말이 없어 나 역시 얼굴만 빤히 쳐다보고 있자니
녀석도 이제 슬슬 포기하려는 눈치다.
그러더니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갑자기 기분 좋은 얼굴로 변하고는 질문을 던진다.
"그럼 투명인간끼리도 싸울 수 있어요?"
"......?"
남보다 잘난 것 없이 단지 상상력 하나 좋다고 자부하던 나도
그런 생각은 한번도 해본적이 없다.
남에게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끼리 서로 알아볼 수 있을까?
"서로 보이지 않으니 싸울 수 없지."
"아, 그렇군요."
후연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그때부터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어쩌면 투명인간들끼리는 서로 상대를 알아 볼 지도 모른다.
자기들끼리도 등급이 있고 서열이 있고 무리가 있어
암투도 있고 영역싸움도 있을 지 모른다.
점점 생각에 깊이 빠지니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는 결론이 생긴다.
나도 모르게 초등학교 2학년이 되고 있다.
* * *
아이들에게 제일 중요한 교육은 상상력을 키워주고 그 폭을 넒혀주는 일이다.
이미 아이들의 상상력은 어른을 훨씬 능가하는 다양함을 갖추고 있다.
그 상상력의 원동력은 아직 세상의 많은 것들을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우리끼리 하는 말로 '모르면 무식하다'는 말이 있다.
원인과 결과를 모르고 과정과 방법을 모르니 살면서 엉뚱한 제안을 하게 되고
또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한등급 업그레이드된 핀잔을 듣게 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아마도 그동안 살아오면서 몰라서 무식하게 실행에 옮겼다가 실패한 경우보다
알량한 지식으로 인해 지레 겁먹고 포기한 일이 더 많을 것이다.
해보지도 않고 포기한 일이 더 많을 것이며
상상력의 부족으로 예전에 하던 일, 선배가 하던 그대로 답습한 일이 더 많을 것이다.
그리고 선배들의 매너리즘을 흉보면서도
자신도 여지없이 그것을 뒤따라 행한 적이 더 많을 것이다.
이게 상상력의 빈곤이 아니고 뭘까?
어른들이 아이보다 훨씬더 상상력이 빈곤하다.
아이들에게 상상력을 키워주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른들이 먼저 상상력을 넓혀가는 노력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상상력을 넓히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다. 고정관념에서만 벗어나면 된다.
아마 이러한 고정관념이 그동안 지루한 삶의 반복을 억지로 유지시켰을 것이다.
아이들은 때론 어른들의 스승이 되기도 한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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