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선(線)

아하누가 2024. 7. 7. 00:52


내게 남보다 좀 특이한 재주가 하나 있다면 바로 선에 관한 것이다. 

막연히 선(線)이라 하면 도통 개념이 잘 정립되지 않을테지만 

간단하면 말하면 줄긋기를 잘한다는 것이다. 

줄긋기 뿐만 아니라 줄 간격 맞추기, 눈대중으로 평행 맞추기 등 

재주라고 하기에도 뭔가 부족해 보이는 것들이다. 

자 같은 받침점 없이 연필로 종이에 일정한 간격으로 선을 긋는 대회가 있다면 

한번 나가보고 싶은 생각을 늘 가지고 있다. 

 

내가 말하는 선이란 디자인에서 말하는 시각적 크기로, 

측정도구에 의지하여 정확한 간격을 이루는거나 평행 수직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변상황과의 상관관계로 벌어질 수 있는 실질적 간격을 

철저한 시각에 의존한 시각적 크기다. 

 

 

얼핏 대단한 재주 같기도 하지만 이런 재주 아닌 재주는 

세상에 이름을 날리는데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할뿐더러 

개인기나 장기자랑으로도 전혀 그 실력과 가치를 발휘하고나 인정받지 못하는 

불행한 재주다. 

이런 재주는 훈련과 교육에 의해서 터득된 것이 아니라 

단지 타고난 감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형제 자매들 또한 남 못지 않게 줄을 잘도 그어대는 걸로 보아 아마도 확실할 것이다. 

특히 아들 녀석이 아주 어렸을 때 자주 쌓던 도미노 놀이를 옆에서 지켜본 바, 

도미노를 세우는 일정한 각도와 어린 애라곤 믿어지기 힘든 일정한 간격을 

감각만으로 유지하고 있어 매우 놀랐던 기억을 더듬어 보니 

집안 내력과 상당히 관계 있는 가문의 유산인 모양이다. 

 

결국 한때는 전공 과목과 약간 관련이 있었고 

또 밥 먹고 사는 업무중에 이와 관련된 일이 잠깐 등장하여 

반짝 빛을 발휘하기도 했지만 모든 업무가 컴퓨터로 이루어지는 현대에 들어서는 

이러한 능력은 전혀 발휘할 수도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따라서 이러한 재주 아닌 재주는 혼자만 알고 있는 재주였으며 

간혹 액자를 벽에 걸 때라던가, 책상을 배열할 때 

또는 사진을 앨범에 정리할 때나 발휘해야 하는 불행한 재주가 되고 말았다. 

가끔은 컴퓨터가 원망스럽다.

 

* * *

 

얼마전 강원도 집에 잔디를 심었다. 

마당에 잔디를 심는 일이 서울 태생인 내게는 쉽지 않은 일이라 

하루종일 삽과 호미 심지어 작두질을 하며 낑낑거리자니 

옆집 이장님이 보기에도 안스러운 모양이라 거들어주려 오셨다.

 

"내가 미리 땅을 파둘 테니 쭉 심더래요"

"그러면 고맙지요."

 

이장님은 괭이를 들고 잔디가 심어질 가는 폭의 땅을 파고 

나는 넓은 잔디 뗏장을 잘게 쪼개는 일을 하는, 

분담 형태가 이루어진 지 불과 얼마 안되는 시간. 

잠시 하리를 펴려고 고개를 든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장님이 잔디를 심기 위해 파둔 땅에 펼쳐진 놀라운 선의 배열. 

난 여태껏 태어나서 저리도 정갈하고 일률적이며 예술적을 선을 본적이 없다. 

자세히 들어다보면 울퉁불퉁하나 한걸음만 뒤로 떨어져 보면 곧디 곧은 직선, 

그렇게 만들어진 직선은 옆의 줄과 일정한 간격을 이루면서 곱게 평행을 유지하고 있었다. 

땅을 팠기 때문에 줄 옆에 쌓여진 흙더미들도 모두 적당량을 이루면서 

선의 평행과 간격에 시각적 도움을 주고 있다. 

단지 대여섯줄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 앞으로 20줄, 아니 몇백줄의 도랑을 파더라도 

조금의 흔들림 없이 일정할 것이 확실하다. 땀이 다 난다. 

이런 줄을 살다살다 처음 본 듯싶다. 

단지 땅을 파는 것만으로도 예술의 칭호가 붙어 마땅한 놀라운 현상이다. 

과연 이장님은 얼마나 뛰어난 감각을 타고 낫기에 

땅을 파면서도 이런 예술적인 감각이 나타나는 것인가.

 

"이장님, 그거 얼마나 하셨어요??"

"뭐 오래랄 거 있나. 한 오십년 했나...?"

".......!"

 

세상 모든 일엔 다 이치가 있고 섭리가 있다.

아무리 뛰어난 감각을 가진 사람이라도 

오랜 시간 반복된 노력을 따라갈 수는 없는 것이다. 

어디선가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면 

아마 그 아름다움은 부지런한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일게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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