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장이라는 단어를 적고 나니 여러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무언가 약속을 굳게 다질 때도 도장을 찍는다는 표현을 하고
잘 지내던 사람끼리 헤어지려는 확실한 다짐을 할 때도
도장 찍는다는 표현을 한다.
그런가 하면 젊은 남녀가 어쩌구 저쩌구 하룻밤을 같이 지내고 난뒤
보수적 관념의 남자가 마치 상대가 제 여자라도 된양
'도장을 찍었다'라고도 표현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 도장의 용도야말로 참으로 다양한 셈이다.
하지만 그거야 다 옛날 이야기지 요즘 세상이 또 어디 그런가.
세상의 모든 서명이 손쉬운 사인 제도로 바뀌어가는 추세다 보니
도장을 이용해야 하는 경우는 집문서가 오가거나
커다란 계약이 오가는 상황에서나 사용하게 되는게 요즘 도장의 용도일 것이다.
* * *
오후에 필요한 서류가 있어 시내의 공증사무실을 찾았다.
공증 서류에 도장을 찍으란다. 하지만 도장이 없다.
요즘 세상에 도장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있나.
도장이 없다고 하니 만들어서라도 찍어야 서류가 접수 된다고 한다.
될 수 있는 한 도장없이 일을 진행해보려고
따지기도 하고 사정도 했지만 전혀 통하지 않는다.
항의와 읍소의 주요 내용은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였다.
하지만 막상 아쉬운 사람은 나였기에 억울함과 답답함을 안은 채
도장 만드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그러면서도 뭔가 풀리지 않은 답답함이 계속 마음에 남았던지
똑같은 말을 계속 내뱉고 있었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도장을 만들어 근처 문방구 한켠에 자리잡은 도장집에 들어가
가장 싸고 보잘 것 없는 도장을 하나 주문했다.
나이가 지긋이 드신 전문가(?) 아저씨는
돋보기 안경을 고쳐 쓰고는 메모지에 써준 내 이름을 넌지시 살펴본다.
비록 짧은 순간이지만 아마 그 눈길의 의미는
이름을 이루는 글자의 특징을 분석하여 나름대로 구상한 서체의 선정과
디자인을 구상하는 중이리라.
하지만 그 전문가는 바로 컴퓨터 화면을 켜더니 프로그램을 작동시킨다.
도장 새기는 프로그램이다.
그 프로그램에 이름을 입력하고 글자의 장평(長平),
테두리와의 간격 등을 대충 조절하고는
싸구려 나무 도장을 도장 파는 기계에 단단히 물린다.
그리고 컴퓨터 키보드의 엔터를 누르니 기계는 나무 도장에 다가와
도장을 새기기 시작하고,
옆의 모니터는 도장이 새겨지는 상황을 모니터하고 있다.
두꺼운 돋보기 안경너머로 작은 도장을 쳐다보며
잘 움직이지 않는 조각칼이 여러번 나무 위를 정성스럽게 오갈 것이라 생각했던
나의 상상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렇게 놀랍고도 빠른 장치와 속도로 도장은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와! 요즘은 도장도 이렇게 새기네요?"
세상의 빠른 변화에 늘 익숙하려도 하면서도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그런 놀라움은 익숙하려는 노력과는 별도로 또다른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기계가 만들어낸 도장을 손질하던 전문가 어르신은
그런 질문을 많이 들어왔는듯
나의 질문에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담담히 대답한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
과연 요즘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아직도 공문서에 도장이 필요한 게 요즘 세상의 참 모습인가?
아니면 도장 마저도 첨단 기계가 만들어주는 세상이 요즘 세상일까?
지금 우리는 정의를 내리기가 참으로 곤란한 '요즘 세상'에 살고 있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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