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다보면 자신보다 한수 위라고 생각되는 상황이나 사람을 만나게 된다.
때로는 그 상황이 불쾌하여 한수 높은 상대방을 애써 부정하게 되고
때로는 흔쾌히 상대의 고단수에 꼬리를 내리기도 한다.
이렇듯 간혹 불쾌하거나 치졸한 자존심 때문에 상대를 부정하는 경우도 있지만
고단수와 만나는 상황을 겪게되는 것은 상당히 유쾌한 일임에 틀림없다.
자주 가는 인터넷 커뮤니티는
많은 사람들이 접속하여 공통된 취미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곳이다.
하지만 이러한 가상의 조직 역시 사람들이 살고 부대끼는 곳이라
크고 작은 언쟁과 논쟁, 그리고 감정싸움이 따라다니는 모양이다.
결국 사람들이 그러한 감정의 조절실패로 상처를 입기도 하고
애꿎은 분위기만 썰렁해지고 만다.
내가 자주 가던 그 조직도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으로
한차례 홍역을 치르더니 새로운 대표를 선출했다.
새로운 대표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람이다.
당연히 친분이 있으니 이 새로운 대표는 내게
인터넷 커뮤니티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도움을 요청할 것이다.
정보를 주고 받는 유용한 사이트지만 내 입장에선 철저한 관망자일 뿐
적극적인 활동을 하기 싫어하는 내가 그런 일을 할 리는 절대 없다.
그러한 개인적인 성향을 잘 알고 있는 그였지만
그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무거운 의무가 부담스러워
어떻게든 내게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게 될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그의 일일 뿐 내가 도와야 하는 이유는 없었다.
아마 그것은 그 역시 나만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새 대표에 당선되고 며칠이 지나도 그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내 도움이 필요할테고 그리고 그 도움의 요청은 평범하게 이루어져서는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라는 사실도 그는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러더니 일주일 뒤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올 것이 온 셈이다.
하지만 내겐 그런 일은 전혀 관심 없는 일이다.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을 도와준다는 이유만으로 할만큼
나는 착한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예상되는 그의 부탁엔 이런저런 핑계없이 단호하게 거절해야 한다는 것이
통화버튼을 누르기 전에 단정한 나의 생각이었다.
일상적인 문안과 인사로 대화를 나누다 약간, 아주 약간의 여백이 생겼다.
그 여백은 격투기 선수들의 시합을 알리는 종소리처럼
이제 형식적인 인사는 끝나고 본론으로 들어가겠다는 서로의 약속이었던 셈이다.
그는 의외로 매우 가벼운 말투로 내가 예상하던 그 부탁을 시작했다.
"저기, 김형 말이오."
"뭡니까?"
그러나 그의 제안 방식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음... 참한 여자친구 한명 소개해주려는데....."
"......?"
이런 식의 접근은 거절의 의사가 단호한 내가 그려본
여러가지 예상 경우의 수에 속해있지도 않은, 매우 당황스러운 제안이었다.
도저히 이 상황에서는 나올 수 없는, 나와서도 안되는 시도였다.
다소 서먹한 긴장을 풀어주는 농담의 의미도 있고
본격적인 제안에 앞서 이미 기선을 잡겠다는 의도도 있는 제안이다.
더욱이 이 제안의 핵심은 정말 여자친구를 소개해주지 않아도
상대를 원망할 수가 없게 되어있다는 구조적 특징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이 제안의 하이라이트는
이 정도 카드를 들고 나올 고수라면
얼른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게 된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줍잖은 논리를 들고 나와 반박을 한다면
한수 모자란 것을 스스로 인정해야 되니 울며 겨지 먹기가 되는 셈이다.
한수 접고 들어가 나중에 카운터 펀치를 노리는 작전밖에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니
이미 상대의 장단에 맞춰 추기 싫은 춤을 추어야 한다.
적어도 고수가 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어느날 아침에 벌어진 작은 해프닝 - 더듬어 기억하기도 쉽잖은 작은 -이었지만
이런 상황을 맞는다는 것은 내게 참 행복한 일이다.
아직 주변엔 나보다 한수위의 사람이 많으니 말이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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