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 편 이장 댁에 모처럼 민박 손님이 왔다.
여름 휴가 이후로 뜸했던 손님인데,
단풍이 절정을 이루는 계절이 되자 찾아온 반가운 손님이다.
이장 댁은 원주로 출가한 자녀들을 위해 집을 조금 크게 지었는데,
두 내외만 지내기에 적적하여 민박 손님을 받는다.
하지만 돈도 많이 받지 않는다. 그저 사람 사는 냄새가 아쉬울 뿐이다.
그날 저녁 민박집 손님 차가 이장 댁으로 진입하려던 순간
뒤에서 앞지르려던 트럭과 부딪혔다.
문 한짝이 완전히 찌그러진, 사람이 다치지 않는 범위에서는 제법 큰 사고였다.
저녁 식사를 앞두고 아내에게서 소식을 듣고 곧 현장으로 갔다.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두운 길에 차량 두대만 비상등을 켜고 있고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씨끄럽게 웅성거리고 있다.
워낙 어두운 길이라 어느 차가 민박집 손님 차인지,
또 어느 차가 또 다른 차인지 알 수 없었고
당연히 서있는 사람들도 누가 손님이고 누가 행인인지 구별할 방법이 없었다.
다만 부딪힌 채로 정지되어 있는 차량의 상태와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얘기를 귀담으며
사고 상황을 가늠하고 있을 뿐이었다.
문득 궁금한 점이 생각나 이장님께 물었다.
"경찰에 신고는 했어요?"
"아이구, 경찰에 신고해야 골치만 아파요."
"그럼 보험화사는요?"
주변을 둘러보던 이장님이 대답했다.
"아까 다들 연락 하는 모양이던데?"
행여 자신의 집을 찾아온 손님이 화를 입을까 이장님은 내내 안절부절이다.
"보험회사 직원이 온답니까?"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모를 누군가 이장님의 대답을 대신했다.
"토요일 밤에, 그리고 이 시골까지 누가 오겠어요?"
"......?"
그렇다면 경찰에 신고도 안할 것이고 보험회사 직원도 오지 않는다는 얘긴데
여기서 계속 이렇게 피해, 가해를 따지며 목소리만 높인 채 밤을 세울 셈인가?
멀지도 않은 우리 집이지만 한달음에 달려가
차량 트렁크에 보관되어져 있는
흰색 스프레이 페인트(라커)와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다시 현장으로 왔다.
바닥에 부지런히 바퀴자국을 표시했다.
차량의 접촉으로 표시가 어려운 지점은 차밑으로 기어들어가
라커 특유의 휘발성 미세 가루를 마셔가며 바닥에 표시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카메라를 꺼내 들고 촬영 시작.
카메라 플래쉬가 터지자 앙칼진 목소리를 가진 여자가 험악한 말투로 소리친다.
"사진 찍는 아저씨는 뭐예요? 경찰이에요? 보험회사 직원이에요?"
아무리 사고가 나서 기분이 나빠도 사진을 찍어주면 고맙다고 해야지
신경질적인 반응은 나 역시 반갑지 않은 상황이다.
"나요?"
그리고 나는 그동안 태어나서 몇 번 해보지 않은 명대답을 남겼다.
"나..... 옆집 아저씨...."
사진을 다 찍으니 사고 당사자들도 별로 할 말도 없고 할 일도 없다.
남은 일이라곤 서로 말꼬리 잡고 목에 핏줄 올리는 일 뿐인데
그것은 사고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진 찍고 현장 표시했으니 그만 가시죠...."
누군가 또 내 말꼬리를 잡고 늘어진다.
더 이상 대꾸없이 이장님께만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집에 찾아온 손님이 당한 사고에 이장님 표정이 매우 안스럽게 보인다.
다음날 이른 아침, 아직 잠에서 덜 깨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아내가 밖으로 나갔다 들어온다.
"누구여? 매너도 없게. 이 시간에...."
"어제 사고 난 사람들이래요. 사진 찍은 거 볼 수 있냐고..."
"그래서?"
"애기 아빠 일어나면 오라고 했지요. 매너도 없는 사람들..."
아내 역시 유쾌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아침 밥을 먹을 즈음 또 손님이 찾아왔다. 같은 내용이다. 필름 좀 달란다.
사진은 디지털카메라로 찍어서 필름은 없고,
지금은 밧데리가 떨어져서 볼 수 없으니 이메일 주소를 알려주면 보내준다고 했다.
디지털이니 이메일이니 하는 용어가 생소했는지
채 납득하지 않은 표정으로 연락처만 적고 가버렸다.
누가 잘했고 잘 못했는지 따지기도 싫다.
직접 나서서 사진 찍고 바닥에 사고 표시했다는 것도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단지 당황한 이장님 생각해서 어떻게든 뒷소리 안나게 해결하려고 도움을 주려했을 뿐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이왕이면 이장님 댁에 온 손님이
피해를 안당했으면 하는 단순한 바람 뿐이었다.
* * *
다음날 밤.
TV 시사프로그램에서 국정감사 감시단 활동을 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에 반응하는 국회의원들의 태도도 보았다.
조는 모습이 담겼다는 이유로 정식으로 허가 받은 시민기자들의 촬영 테이프를
강제로 빼앗는 장면을 보다 문득 지난 밤에 있었던 이장 댁 앞의 자동차 사고가 생각났다.
사진 찍을 때 큰 소리로 따지던 사람이 분명 가해차량의 주인공일 것이다.
그리고 아쉬운 듯 사진을 찾으러 온 사람이 피해차량의 주인공일 것이다.
정당한 상황에서 사진 찍히기 꺼리는 모든 경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모두 같은 이유일 것이다.
2004년 10월.
강원도 횡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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