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에는 비누가 없다.
남들이 들으면 아마 일인당 국민소득 만불시대에 이게 무슨 말인지 헷갈릴게다.
집에 있는 비누는 향수 냄새가 꽤 많이 나는 포도주색의 반투명한 미용비누와
피부과에서 직접 제조했다는 냄새없는 하얀색 비누의 두 종류뿐이다.
두 비누 모두 거품이 많이 일어나지 않아 비누칠을 듬뿍 북적거리는 맛도 없고
특유의 비누 향기가 없어 조금 싱겁다. 비누는 아무래도 비누다와야 한다.
잔뜩 가공된 화장품의 향기보다 풋풋한 비누향이 더 좋게 느껴질 때가 많으니까.
내가 알고 있는 비누는 다이얼 비누로 시작해서 이의 아류작인 데이트 비누,
그리고 인삼 냄새나는 인삼비누, 우유비누, 큼직하고 딱딱한 비놀리아,
그리고 식물나라 정도인데 이런 비누를 우리집에선 찾을 수가 없다.
그래서 매번 비누를 쓰면서 아쉽고 서운한 생각을 하다
어느 일요일 저녁에 집 앞 마트에 갈 때 잊지 않고 비누를 사기로 했다.
용케 잊지않고 마트의 비누 코너를 찾았고 많은 비누가 진열되어 있었지만
앞에 나열한 그런 비누들은 단 하나도 없었다.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도 내가 생각했던 비누를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태어나서 내가 비누를 산 일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혼자 비누를 살펴보다 포장과 이름이 제일 맘에 드는 <블루칩>이라는 비누를 골랐다.
너무 고급스럽지도 않고 싸구려 같아 보이지 않는 포장이 마음에 들었고
혹시나 <블루칩>이란 이름의 비누를 쓰면 주식이 오르지 않을까 하는
앙증맞은 생각도 있었다.
이름이 블루칩이니 비누색깔은 당연히 파란색일 것이다.
그러면 집에서 쓰는 비누들과 헛갈리지도 않을테고
아내는 피부미용에 신경쓸테니 이 비누를 쓰진 않을 테니
하나만 사도 몇 개월은 쓸 것이다.
* * *
그리고 집에 있는 파란색 비누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혼자 써서 그러지 닳지도 않고 기분이 좋다.
거품이 조금 인색하게 나오고 향이 진하진 않지만
그것은 요즘 비누들의 전체적 특징인 것 같아 기분좋게 사용하고 있다.
한달쯤 지난 어느날 세면기 위를 보니 파란 색의 새 비누가 놓여있다.
비누 겉면에는 <블루칩>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음각되어 있다.
".....?"
그렇다면 이게 그 때 사온 그 비눈가?
비누를 새로 사온 줄 알고 욕실 문을 열어 아내에게 물으려는 순간
방청소를 하는 아내의 혼잣말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자꾸 빨래비누가 줄어드는 거지?"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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