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늦은 시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늦은 시간임에도 사람은 많았지만 용케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을 수 있었다.
요즘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는 한문책을 펴고 몇자 보니 금방 피곤해진다.
잠시 눈을 감으니 조금 편안해졌다.
내 앞에 서있는 사람은 내가 자리에 앉을 무렵부터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책을 덮고 눈을 감으니 그 목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온다.
지하철에서 남의 전화통화를 옆에서 듣는 일이란 별로 유쾌하지 않다.
전화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유난히 클뿐더러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의 대화내용이란
전혀 중요하지 않은 내용이니까.
애써 듣지 않으려는데 앞사람의 전화통화는 계속 내 귀를 통해
예민한 신경을 정확히 찌른다.
"아이, 이 아저씨가 정말 못하는 말이 없어~"
30대 이상의 아줌마로 예상되는 이 여자의 목소리는 유난히 앙칼지다.
더욱이 그 통화의 내용이 묘한 뉘앙스를 담고 있어
안 그래도 귓가에 또렷이 들리는 목소리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간드러진 목소리를 가진 여인의 잡담은 계속되고 있다.
눈을 감은 채 이 여인의 모습을 상상해봤다.
몸집은 매우 뚱뚱할 것이고 나름대로 멋들어진다고 생각되는 안경을 썼을 것이다.
그리고 눈매는 매우 신경질적일 것이며
행동거지는 푼수나 주접 스타일에 가까울 것이다.
주로 이런 사람들에게는 공공장소에서의 예의는 찾을 수 없고
자신의 편리함만 추구하는 스타일일 것이다.
아마 초등학교 2학년쯤 되는 자신의 자녀에게
버스를 탈 때는 유치원생이라고 말하라고 가르칠 것이다.
그러면서 동네 아줌마들을 만나면 명품에 대해 얘기할 것이고
시장에 가서는 인정사정없이 콩나물 값을 깎을 것이다.
난 이런 유형의 사람을 많이 본다. 우리집에도 한 사람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그 여자의 생김새를 확인하기로 했다.
내 예상이 맞아준다면 거기서 조금이나마 전화통화로 인해 불쾌해진 내 정서가
즐거움을 찾을 것이고, 설령 예상이 완전히 빗나가 절세미인의 여자가 서있다면
그것 또한 그리 불쾌하진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예상되는 커다란 두가지의 경우의 수가
모두 불쾌한 것은 아니라는 잔머리를 굴리니 현재의 상황이 조금 재미있어진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 앞사람을 쳐다보았다.
"헉!"
여자가 아니라 남자다.
아직도 통화를 계속 이어가고 있는 그 사람은 가수 엄정화가 3집인가 4집인가 냈을 때
고혹적인 눈매와 어울리던 그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으며
통화를 하면서 자연스레 움직이는 손짓이 여지없이 여자들의 그것과 똑같았다.
이미 주변의 눈길을 끌었는지 나 말고도 옆에 서있는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다.
재미있다는 표정과 짜증난다는 표정이 반씩 섞여 있다.
두 정거장 정도 통화를 하더니 그 남자는 지하철에서 내렸다.
내릴 때도 예의 그 자세를 잊지 않고 엉덩이를 살랑거리며
종종걸음으로 출입문을 향해 걸어갔다.
* * *
여기까지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있었던 상황이다.
그리고 그 상황을 자세히 묘사했으면 무언가 결론을 지어야 하는데
도무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저마다 다르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제 멋에 산다고 해야 하는 건지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사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분명히 보기 싫은 꼴을 봤는데
이게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내가 남들이 이상하다고 할까봐 그게 걱정이 된다.
워낙 개성이 강조되고 '컨셉'이란 단어가 화두를 이루는 시대니
이런 걸 가지고 불쾌해진다는 사실이 시대와 동떨어진다는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도 아마 나를 괴롭히는 적잖은 스트레스일지 모른다.
시대의 변화는 따라가더라도 스스로 수용은 하면서 따라가자.
모르면서 남들이 그러니 내키지도 않으면서 뒤쫓아가지 말고 말이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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