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에 비하면 새 발의 피겠지만 내게는 남보다 조금 나은 재주가 한가지 있다.
음악을 듣는 귀가 남보다 조금 발달한 것 같다.
정식으로 음악 공부를 한 적은 없고, 물론 음악을 정식으로 배워보려고
노력한 적도 없다.
그저 라디오를 통해, 오디오를 통해 들리는 음악을
주의깊게 들으려는 노력을 하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한 것뿐이다.
물론 그 방법이 옳은 건지 아닌지도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전문가라는 사람을 만나서 상의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 뿐이지
그것을 객관성을 빌어 확인받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리고 그 전문가라는 사람도 내가 인정해야 전문가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이렇듯 음악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재주를 가졌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내가 음악을 전문으로 하거나 음악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니
살아가면서 그것을 활용할 기회는 전혀 없다.
TV의 쇼프로그램을 보며 지금 노래하는 가수가 진짜로 노래를 하는지
입만 벙끗거리는 지 남보다 한발 앞서 맞추고 혼자만의 우월감에 젖거나,
노래방 기계 반주의 음정이 조금 틀린 부분을 잡아내고
전혀 관심없는 동행인에게 잘난 척을 할 뿐이다.
또는 생음악을 연주하는 바에서 키타줄이 맞았는지 안맞았는지
유심히 듣는 것이 고작이거나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팝송을 들으며 묻지도 않은 일행에게
저 노래가 어쩌고 저 가수가 어쩌고 별로 쓸모없는 지식만 늘어놓을 뿐이다.
물론 당연히 음악을 정식으로 한다 해도 남보다 더 잘할 자신은 없다.
그러니까 뒤에서 이렇게 궁시렁궁시렁 대기만 할 뿐이다.
* * *
오전에 지하철을 탔다.
한가한 시간이어서 그랬는지 자리가 텅텅 비었다.
한쪽 구석에 자리잡고 머리를 뒤로 기댄 채 잠시 눈을 감고 있는데
음악소리가 크게 들려 온다. 지하철 잡상인이다.
잡상인은 커다란 가방과 그 위에
커다란 녹음기(카세트와 CD가 같이 재생되는 것)를 얹고 영업을 시작하고 있다.
어디서 배웠는지 교본대로, 교안대로 술술 말을 하기 시작했다.
가끔 지하철에서 이런 장사꾼들을 보게 되는데 이상하리만큼 공통점이 한가지가 있다.
항상 샘플로 들려주는 곡이 Skeeter Davis의 <The end of the world>와
Lobo의 <I'd love you to want me>다.
분명히 테이프 생산지는 다르고 내용도 다른 것 같은데도 들려주는 노래는 저 두 곡이다.
거참 희안한 일이다.
오늘도 그 두 곡이 흘러나오고 있다.
그 노래를 들으면 나는 항상 같은 생각을 한다.
지금 나오는 곡은 원래 노래를 불러 히트시킨 그 가수의 목소리와 그 반주가 아니다.
얼핏 듣기에는 구별이 안가는 것 같지만 조금만 관심이 있다면
그것은 쉽게 구별해 낼 수 있다.
노래는 아마도 필리핀 가수나 또는 바에서 일하는 무명 가수가
원래 가수를 흉내낸 것 같고,
반주는 미디를 이용해서 잘 만든 전자음향이다.
전문적인 용어는 잘 기억이 나지 않고
보통 그런 앨범을 커버버전(Cover Version)이라 하여 B품 취급하던 음반이다.
그렇게 만드는 이유는 정말 남의 음반을 복사해서 팔 경우
법에 저촉되어 큰 피해를 보게 되는 경우도 생기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리어카에서 팔던 음반들이 그랬다.
용돈 모아 기껏 한 개를 골랐는데 그런 B품이었을 때의 상심이란.....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들리는 음악을 조금만 들어도 그것이 어떤 음악인지 쉽게 알 것 같다.
장사를 하는 상인은 배운대로, 교안대로 계속 말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문득 한마디가 내 귀에 쏙 들어왔다.
"가끔 사람들이 이거 진짜 오리지날 맞냐고 하시는데
지금 이 노래들은 원곡 그대로, 원 가수 그대로 나오고 있는 겁니다."
계속 눈을 감고 듣고 있었지만 이야말로 환장할 노릇이다.
벌떡 일어나서 이게 정말 오리지날인지 아닌지 나랑 내기하자고 하고 싶었지만
상인의 외모 및 풍기는 이미지로 보아 백날 싸워봐야
내가 이기지 못할 것 같아 다시 눈을 감았다.
마침 내 옆에 앉은 아줌마가 CD를 샀다.
여러장 있는 걸로 보아 노래는 많이 들어있겠지만 그게 제대로 된 노래들이 아닌 이상
그 아줌마는 왠지 모를 이유로 그 CD를 점점 듣지 않게 될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공들이지 않은 것들은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그 가치를 느끼게 되니까.
옆에서 CD를 뒤적거리는 아줌마에게 뭐라고 한마디하고 싶어 입이 간질거렸다.
하지만 이미 샀는데 쓸데없는 말해서 뭐하랴.
그 아줌마가 만원 어치라도 그 CD를 잘 활용했으면 좋겠다.
문득 얼마전에 지하철 안에서 아이들 장난감을 샀던 기억이 떠올랐다.
돌리면 불이 켜지는 팽이여서 천원주고 두 개 샀던 기억이 난다.
그때 아마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을 지도 모를
장난감 전문가나 중국산 장난감 수입업체 관련자가 나를 딱한 눈으로 쳐다봤을 것이다.
그 생각을 떠올리니 갑자기 얼굴이 붉어진다.
요즘 세상엔 모르는 것처럼 편한 것은 없다.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스트레스다.
풍부한 지식의 높이를 쌓으려면 그만한 인격의 높이도 갖추어야 한다는
옛말이 새삼스럽다.
옆 사람이 산 가짜 CD에 마음이 답답해지는 걸 보니
내가 잘난 척하는 지식들은 모두 다 얄팍한 것인가 보다.
그리고 그 얄팍함 만큼의 품성도 갖추어지지 않은 모양이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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