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어떤 탈주극 사건이 떠오른다.
서울올림픽이 끝난 1988년 10월의 어느 일요일.
서울 남가좌동의 한 주택가에 엄청난 소란이 벌어졌다.
그때 나는 서대문구청 방역과에서 소독약 뿌리는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고,
남가좌동이면 같은 지역구 관내였다.
전국으로 생방송된 이 인질극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명언을 남겼고
탈옥과 인질극으로 이어지는 엄청난 화제를 뿌렸다.
결국 탈주범들이 대부분 사살 또는 자살함으로써
마치 영화의 한장면처럼 막을 내렸다.
실제 이 사건은 '홀리데이'라는 이름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당시 상습절도죄 등으로 인해 17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지강헌 등은
뜻을 같이 하는 재소자들과 탈주를 계획한다.
이어 이들이 수감중인 영등포교도소에서 공주교도소로 이감되는 토요일,
주말이어서 이들에 대한 감독이 허술한 점을 이용해 탈주에 성공한다.
이어 전국은 검문과 검색으로 전 도로가 통제되는 등 상당한 혼란을 겪었지만
탈주범들은 유유히 가정집 등에 칩입하여 8일 동안 잡히지 않고 돌아다닌다.
결국 어느 일요일 남가좌동에서 최후를 맞이 하게 되었다는 것이
지강헌을 비롯한 일부 탈주범들이 세간을 놀라게 했던 탈주극의 주요 내용이다.
탈주극만 극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이들이 사회적으로 화제를 일으킨 데는 몇가지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먼저 놀라운 것은 시민들의 반응이었다.
7명이 무리지어 다니며 낮에는 한 가정에 칩입해 가족을 협박해 휴식을 취하고
밤이면 유유히 이동하는 일정을 계속 했다.
그러나 단 한사람의 민간인도 해를 입히지 않았고,
오히려 칩입당한 식구들이 나중에 탄원서를 올리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범법자이나 사악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주장이었다.
이런 기현상 속에 보도는 연일 탈주범들의 기이한 행동에 초점이 맞추어졌고,
심지어 이들이 잡히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 늘어나는
또 하나의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사건을 드라마틱하게 만든 또 하나의 주된 사연이 있다.
탈주범의 대표격인 지강헌이 남긴 한마디. 유전무죄 무전유죄다.
한마디로 돈이 있으면 무죄가 되고,
돈이 없으면 유죄가 되는 세상을 비난한 것인데,
이말은 인질극 당시 생방송을 통해 전국에 퍼졌고,
비록 탈주범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말에 동감했었다.
탈주범 지강헌은
어린 시절 시인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고 하는 이후 보도를 보니
이 말이 그의 감성을 잘 아우른 말인 듯싶다.
아직도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은 사회 곳곳에 등장한다.
이래서는 안되는 일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미 체념한 듯
이 말을 현실로 받아들이곤 한다.
돈이 있다고 죄가 없어져서는 안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아닌가.
이 사건 이후 시간도 벌써 19년이 지났다.
* * *
최근 보도에 자주 등장하는 재벌이 있다.
아들이 강남의 고급 술집에서 시비가 붙어 폭행을 당하자,
재벌인 아버지가 힘깨나 쓰는 무리를 대동하고 직접 나서
그 가해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뉴스다.
맞고 들어온 아들을 보며 가슴 아프지 않은 아버지가 어디있겠냐만
어마어마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권력으로 이를 응징한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일수록
법의 잣대로 대처해야 했음이 옳다.
여기까지의 상황은 다 알고 있는 내용인데, 그 뒤 경찰 수사가 조금 우습다.
일단 사건이 벌어지고 45일이 지나서야 세상에 알려진 것도 그렇고,
수사하는 과정에서도
경찰의 출두명령에 두번이나 거부한 뒤 출두한 것도 그렇다.
돈있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범죄나 법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배워왔는데,
그런 가르침들이 돈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수사 진행도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간다.
가해자였다가 졸지에 피해자가 된 사람들은 보복이 두려워
제대로된 진술을 못하고 있어 아마 무죄로 처리될 가능성도 상당히 많다.
분명히 용역회사 직원을 동원해서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했는데
죄가 없다는 판결이 나온다면?
이거야말로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전형이 아닐까 싶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법앞에서는 평등해야 한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 볼 수 있는 현실은
절대로 법앞에서 평등함은 없다는 사실이다.
어느 재벌의 신중하지 못한 행동에 강경한 처벌을 하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다른 일반 시민의 한사람이어서 일어날 수 있었던 것과
똑같은 처벌을 해달라는 것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은
오래전 영화같은 한 장면의 얘깃거리로만 남아있어야 한다.
아하누가
유전무죄 무전유죄...... 최근 100년간 나온 말 중 가장 파급력이 센 말일 것이다.
'유머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외거주자의 참정권 (0) | 2024.02.21 |
---|---|
외유 (0) | 2024.02.21 |
보궐선거 (0) | 2024.02.21 |
2006 독일월드컵 개막! 축제를 즐길 시간 (0) | 2024.02.21 |
디자인의 진정한 의미 (0) | 2024.0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