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센 마누라는 여자보다 아름답다

아내와 가방

아하누가 2024. 7. 6. 02:21



“이거 너무 비싼 거 같은데?”

 

 

아내가 출퇴근용 가방을 하나 사왔다. 

이름만 대면 대부분 알고 있는 유명 브랜드의 신사용 서류가방이다. 

밝아보이지만 왠지 무게감있는 코발트 블루 색상에, 

좌우상하 라인이 폼나게 살아있는 세련된 디자인의 가방이다. 

이런 가방은 늘씬하게 잘 빠진 모던 세미정장에, 뱃살 나오지 않고 

키가 크고 후리후리한 몸매의 훈남스타일을 가진 젊은 직장인에게 잘 어울릴 듯싶다. 

 

그러나 불행히도, 정말 불행히도 나는 그런 스타일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 

더욱이 내가 늘 입고 다니는 복장이란, 

손으로 드는 서류가방보다는 어깨에 메는, 더 정확히 얘기하면 

등에 메는 배낭 스타일이 제격인 복장이 거의 대부분이다. 

그러니 이렇게 세련된 스타일의 가방은 

태생적으로 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주인을 잘못 만난 가방이었던 셈이다. 

 

 

“얼만데?”

“38만원”

“.....!”

 

 

정말 가방의 라벨에는 38만원이라는 가격표가 정확하게 붙어있었다. 

아마 저 가격을 주고 가방 한 개를 샀다는 이야기는 

이미 마누라는 380만원짜리 얼머스 가방을 하나 샀거나 아니면 

이 가치와 상응하는 옷 두어벌, 그것도 아니면 

매일 목놓아 부르짖는 포트메리온 접시 세트를 한 트럭쯤 주문했을 지도 모른다. 

정말 가방 하나 사기에는 큰 돈이 아닌가? 

 

 

38만원이라면, 프로모션 기회만 잘 이용하면 필리핀 왕복항공권을 4매 구입할 수 있다. 

물론 세금 및 유류할증료까지 포함된 가격이다. 

어디 그뿐인가? 

Canon 카메라의 50mm F1:1.4 렌즈를 하나 살 수 있으며, 

적당한 크기의 LCD TV도 잘하면 구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4인 가족 전원이 들국화 공연도 갈 수 있다. 

지난번처럼 돈이 없어서 둘만 가야 하는 비극도 없앨 수 있다. 

 

 

이렇게 무지막지한 가격을 지출해가며 구입한 가방이어서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그냥 아내의 성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쩌면 아내의 입장에서 남편이라는 사람이 복장과 어울리지 않는, 

그리고 세련되지 않는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도 보기 싫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한 사실은, 정작 나는 그것을 사용할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

하는 일도 그렇고 입고 다니는 옷으로 봐도 배낭이 딱 제격이다.

 

 

그렇다고 쿨한 말투와 ‘뭔가 있어보이는’ 동작으로 아내가 주고간 가방을 

관심없이 받아들기는 곤란해서 일단 고맙다며 받았다. 

안 나오는 눈물도 약간 글썽이며 감동도 표현했다. 

물론 눈물을 글썽이기 위해 오래전에 봤던 영화 ‘스텔라’를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용도는 결국 나의 복장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이어서 

이후 5개월째 장롱 한구석에 잠자고 있었다. 

 

 

 

*     *     *

 

 

 

가방을 구입하고 5개월이 지났을 무렵, 그 가방을 사용해야 할 기회가 생겼다. 

하는 일의 성격이 외부에서 사람을 자주 만나야 하는 업무로 바뀌면서 복장도 달라졌다. 

복장이 달라지니 등에 메고 다니던 배낭도 어울리지 않게 되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적당히 세련된 모던한 스타일의 가방, 

바로 그 중후한 코발트 블루 색의 날렵한 형태를 가진, 

그리고 커다란 브랜드 로고가 금장처럼 장식되어 있는 그 가방이 필요한 타이밍이 온 것이다. 

 

 

“거봐요. 결국 쓸 일이 생기죠?”

 

 

아내는 신이 났다. 

한동안 장롱 구석에 쳐박아 두었을 때는 다소 아쉬운 얼굴도 보였지만 

정작 그것이 필요하게 된 상황에 도달하니 

마치 자신이 이러한 미래를 예견이라도 하고 있었던 양 기세도 등등해졌다. 

물론 이 세상의 모든 물건은 쓸 곳이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자랑스러운 예지자의 표정으로 바뀐 아내의 거만함을 

분노로 바꿀 생각은 없기에 그 말은 애써 참고 있었다. 

 

 

그 가방을 어깨에 메고 출근했다. 

그러나 불과 집밖을 나가 50미터도 채 걷지 않았는데 

어깨에 걸쳐있던 긴 끈이 풀어져 가방은 바닥에 힘없이 떨어졌다. 

가방 양쪽 끝에는 고급스러운 장식으로 어깨에 거는 끈을 고정시키는 장치가 있었는데, 

너무 세련된 디자인에 신경을 쓴 탓인지 고정상태가 양호하지 못하여 

계속 고리에서 미끌어져 어깨에 메고 다니는 끈이 자주 풀어졌다. 

몇 번이나 다시 고정시키고 어깨에 메었으나 

그때마다 몇 분을 버티지 못하고 가방은 힘없이 어깨에서 떨어졌다. 

 

 

이후로 가방끈은 가방 속으로 사라지고 손잡이만 이용해 이틀 동안 들고 다녔다. 

들고 다니다 보면 가끔은 어깨에 거는 기능도 필요하기 마련인데 

제 기능을 못하는 38만원짜리 고급 가방은 오히려 불편을 유발하고 있었다. 

사실 그냥 싼 맛에 산 가방이라면 가격에 대비한 품질이라는 경제성을 고려하여 

무덤덤하게 받아들였을 테지만 

감히 38만원이나 하는, 인생 살면서 가장 비싼 값에 구입한 가방이 

제 기능을 못한다면 이것은 또한 노기를 충만하게 하는 일임은 분명했다. 

 

 

다시 한 때 사용하던, 어느 회사 기념품이라는 증명이 선명하게 새겨져있는 

평범한 서류 가방으로 바꿨다. 

비싼 가격에 비해 사용에 결정적 하자가 있던 38만원짜리 고급가방은 

다시 원래의 제 자리로 돌아갈 상황이었다. 

모든 걸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유별난 특기가 있던 나는 

이런 상황을 덤덤하게 받아들였지만 아내의 노기는 하늘을 찔렀다. 

급기야 아내는 회사에 휴가를 냈고 

며칠 동안 고조된 노기를 애써 간직하며 처음 가방을 구입했던 백화점으로 향했다. 

5개월이 지나서 뭘 어쩌겠냐만, 

분명 내가 아는 저 여자는 상황을 처음으로 되돌려 환불절차를 받을 것이다. 

구입한 지 5개월이 지난 가방을 다시 환불한다는 사실이 

평범한 일상을 살아온 신성한 국민들에게는 얼핏 이해가 가지 않을지 모르지만 

내가 아는 아내는 반드시 목적을 이루고 올 것이다. 

예전에 있었던, 무려 입고 지낸지 4년이 된 여자들의 기능성 속옷의 와이어가 부러져 

허리가 긁혔다며 새 것으로 바꿔온, 기네스북급 전력을 볼 때 

이 싸움은 이미 승부가 난 셈이다. 

상대가 백화점이고 또한 고급 브랜드라는 것은 상당히 호조건에서 벌어지는 싸움이니, 

마치 이것은 대한민국 여자 양궁선수가 자신들이 훈련하던 진천선수촌에서 

과테말라 선수 불러서 양궁시합을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니 이미 상황이 종료되었는지 

아내는 매우 밝은 표정으로 자신의 무용담을 전해주기 시작했다. 

무용담이라는 건 나만의 생각이고 아내에게는 그저 단순한 일상이었을 뿐이다. 

 

 

“어떻게 했어?”

“오래되어서 환불은 곤란하다 그러긴 했는데....  그냥 뭐.....”

 

 

나는 안다. 끝까지 안 들어도 안다. 

5개월전에 구입했다곤 하지만 실제 사용 이틀에, 

결정적 하자가 있는 가방을 환불하는데 아내가 그다지 전투력을 발휘할 일도 없다는 사실을. 

자세한 상황보고는 그다지 듣고 싶지 않아 슬쩍 거부의사를 표현했다. 

아내도 그 정도 작은 일이 자신의 전적에 포함되는 것이 내키지 않았는지 

애써 자제했지만 내심 기분은 좋은 모양이었다. 

 

하긴 그 가방은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살아온 인생, 생활의 패턴, 취향의 문제 등을 고려했을 때 

38만원 짜리의 잘 빠진 가방은 처음부터 내게 가당치도 않은 물건이었으니까. 

38만원이라는 돈의 가치는 살림하는 사람에게는 상당히 크고 소중한 가치니까 

그것이 다시 살림하는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이 

지금 상황에서 바랄 수 있는 최선의 결과인 셈이다. 

 

 

“고생했어요.”

 

 

환불받은 38만원으로 아내에게 10만원 정도 하는 가방을 하나 사달라고 했다. 

그리고 남은 돈으로 아내가 좋아하는 포트메리온 접시도 사고 

애들 필요한 거 있으면 사주라고 했다. 

처음부터 내 돈은 아니었다지만 그래도 나의 희생이 포함된 의지로 생긴 돈이니 

마치 내가 한턱 쏘는 느낌이 들어서 이것도 상당히 즐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즐거움은 잠시, 아내는 참으로 황당한 말을 남겼다. 

그리고 그 말은 5개월간 지켜온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되었다. 

 

 

내 말을 들은 아내가 불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7만 8천원으로 그걸 어떻게 다 사요???”

 

 

 

 

 

 

 

 

 

 

 

 

 

 

 

아하누가

그날 이후 나는 양복 자켓을 입고 배낭을 메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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