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 너무 예쁘다!~"
"그냥 행사장에서 만원 하기에 사온 거야."
주말을 이용해 분당 누나댁에 들렀더니
누나가 후연이와 의연이 입히라며 겨울파커 두 개를 꺼낸다.
짙은 카키색 파커가 앙증맞으면서도 고급스러워 보인다.
"이거 정말 만원이래요?"
아내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몇 번이나 뒤집어 보더니 큰 아이 후연이에게 입혀 본다.
그리고 매우 기분이 좋았는지 작은 아들 의연이도 부른다.
옷을 입히려고 비닐 포장을 뜯으니 앞 지퍼 부분에 예리한 도구에 의해
옷이 약간 찢어져 있었다. 아마도 포장 과정에서 일어난 실수인 것 같았다.
잔뜩 기분을 내던 누나는 곧 표정이 어두워졌다.
나와 아내는 그 정도 상처는 대충 꿰매어 입으면 된다며
얼른 분위기를 업(UP)시키려 했으나 힘들게 옷을 사온 누나 입장에서는
그게 영 내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 상품은 백화점의 행사기간에 산 것으로 약 보름 정도의 시간이 지났으므로
그 행사가 이미 끝났을 것이고
따라서 아직도 그 물건은 이미 없을 것이라는 것이 누나의 예상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개운하지가 않았는지 저녁 식사를 하기전
누나는 얼른 가서 바꾸어오자는 제안을 했다. 그리고 시누와 올케는 조용히 집을 나섰다.
약 두시간이 지나 집으로 돌아온 시누와 올케는 얼굴색이 좋아 보인다.
다행히도 그 행사가 아직도 진행중이어서 어렵지 않게 바꿀 수 있었다고 한다.
누나나 아내나 모두 밝은 표정이다.
가격의 싸고 비쌈을 떠나 일이 개운하게 끝난다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 * *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아내는 백화점에 갔던 이야기를 했다.
정말 좋은 옷 같은데 값이 엄청나게 싸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동안 백화점에서 갈고 닦은 내공을 근거로
달랑 만원짜리 한 장으로 사온 그 옷의 원래 판매 가격을 예상했다.
그리고 대충 그 옷의 정상 판매 가격이 아마 6~7만원은 하지 않았겠냐며
스스로 기분이 좋아지려는 최면성 판단을 내렸다.
좋은 옷을 싸게 샀다면 당연히 좋은 일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내는 돌아오는 차안에 내내 기분이 들떠 있다.
무척 신이 난 어린 아이 같았다.
그러나 그렇게 신이 난 아내의 기분이 일순간에 무너진 것은
그 다음에 나온 내 말 때문이었다.
"그렇게 좋으면 하나 더 사오지. 다희(조카)주면 좋잖아. 만원인데...."
"......!"
아내는 긴 침묵에 빠졌다.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아내는 입을 굳게 닫았지만
나는 그 침묵의 의미를 안다.
싸서 좋다는 말을 몇 번이고 했으면서 하나 더 사올 생각은 못했으니 이 얼마나 억울할까.
조카 하나 사다주면 생색내겠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짱이겠다,
그 좋은 선택을 한순간의 방심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최소 향후 30여일간은 다시 갈 일이 없는 길을 떠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답답할까.
하지만 그런 기분을 알아 챈 나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행여 다시 돌아간다고 해야 백화점이 문을 닫았으니
다시 돌아가자는 말은 하지 않겠지만 속으로 약이 올라 찌개 끓는 소리를 내며
더러운 성질을 보이면 손해볼 사람은 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루는 지나가고 있었고 그 카키색 파커는 아내의 기억 속에서
차츰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내가 카키색 파커를 아직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때는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다음날 일요일 아침이었다.
축구하는 운동장에서 아내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 나 아무래도 다시 분당에 갔다와야겠어.~"
전화기 넘어 들려온 아내의 목소리를 들으니 아내가 밤새 고민을 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내는 몹시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다.
뭔가 하지 못한 일이 생각나면 고민하다 결국 벌떡 일어나 해결해야 하는 사람이다.
잠자다 말고 아침에 옷에 꼽고 나간 브로치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야 한다며
자기가 걸어온 길을 이 잡듯 뒤진 적도 있고,
이번 일처럼 어디서 무언가 좋은 걸 보고 이틀 이상 잊지 않고 있으면
결국은 그것을 사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인내력이라곤 조금도 없어 약간의 고비만 넘기면
제풀에 지쳐버리는 단순함을 함께 가지고 있어
그런 일은 보기에 드물게 일어나는 편이었다.
그러나 지금이 바로 보기 드물게 일어난 상황이다.
아마도 아내는 만원짜리 파커 한 개를 사기 위해 가깝지 않은 분당을
기필코 가고야 말 것이다.
"동생하고 갔다 올게. 축구하고 와서 아이들 보고 있어요."
내게 다시 가잔 말을 하기 민망했는지 아내는 동생을 데리고
또 그 가깝지 않은 길을 떠났다. 불쌍한 처남은 오늘도 운전기사가 되었다.
전날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본 아내의 표정으로 보아
혹시나 만원짜리 파커를 사기 위해 가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역시나 아내는 실행에 옮긴 것이다. 뭐 어쩌겠나. 다 천성인 걸.....
* * *
오후 5시쯤 아내가 돌아왔다.
파커 하나를 꺼내 들고 뭔가 큰일이라도 마쳤다는 듯이 기세가 등등하다.
아무도 시킨 사람 없고 아무도 잘했다고 하는 사람도 없는데
아내는 여전히 즐거운 표정이다.
그리고 하기 싫다는 후연이를 억지로 불러서 조카에게 큰 지 맞는지
입혔다 벗겼다를 반복하고 있다.
TV를 보다 말고 고개를 돌리니 아내가 몹시 만족스러운 얼굴로
힘들게 사온 만원짜리 파커를 쳐다보고 있다.
"에구 그거 사러 거기까지 갔다 온 거야?"
아내는 입을 삐죽 내밀었지만 그래도 싫지 않은 기분이다.
간밤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보인 그 행복감의 정도보다 더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며칠간 지속될 것 같은 아내의 행복감이 일순간에 무너진 것 또한
나의 방정맞은 입 때문이었다.
"이왕 간 거 하나 더 사오지. 만원인데. 옆집 연정이네 선물하게....."
"......!"
아내는 아직도 잠을 못 이루고 있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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