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센 마누라는 여자보다 아름답다

건전지

아하누가 2024. 7. 6. 01:48



“여보! 장난감에 빳데리 떨어졌어요. 얼른 빳데리 사다줘요”

 


모두들 잠이 들어야 정상인 밤 12시가 넘은 시간.
세상에 잠이 많기로 알아주는 아내는 아직 잠을 못자고 있다.
아내가 잠을 못자는 이유는 누굴 닮았는지 밤 늦은 시간까지 잠도 안 자고
줄기차게 놀아대는 큰아들 후연이 때문인데
마침 후연이는 늘 가지고 놀던 장난감 자동차에 건전지가 떨어져 움직이지 않는다고
갖은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건전지가 떨어졌으면 자기가 가서 사오지 왜 아이 놀이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던
나를 끌여 들여 건전지를 사오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자라 그래! 지금 시간이 몇신데.....”

 

건전지를 사러 가기 싫은 이유가 가장 큰 이유였지만 사실 시간이 밤 12시를 넘었는데
장난감을 재정비해서 다시 놀이를 시작하겠다는 건 어린 아이에게 좋지 않은 일이다.
거듭 생각해도 명확한 그 사실은 내게 건전지를 사러가지 않아도 되는
충분한 명분을 만들어 줬고 따라서 건전지를 사러가기 귀찮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도
제법 당당한 말투로 건전지를 살 필요가 없음을 힘주어 말할 수 있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아내는 남은 잔소리를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그래도 애가 더 놀겠다는데 건전지를 사다줘야지...”

 

아까는 분명 투박한 말투로 ‘빳데리’라고 말했는데 지금은 ‘건전지’로
단어의 선택이 바뀐 걸로 보아 나의 정갈한 논리가 먹혀 들어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내의 약해진 모습을 보며 논리가 논리로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확신이 든 나는
조금 더 해박한 지식을 섞어 왜 건전지로 움직이는 장난감이 좋지 않은가에 대한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애들에게는 태엽을 감던가 손으로 움직이게 하는 장난감이 좋다구.
그리고 건전지는 환경보호에도 안 좋구....”

 

근거도 없이 시작한 나의 명확한 해설에 아내가 감동할 것이라는 사실은
단지 나의 생각일 뿐이었고 나의 논리 및 부연설명은 아내의 전투의욕을 일으켜주기에
몹시도 충분하여 아내는 이후 갖은 중상모략과 궤변으로 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예전에 설거지 하랬는데 안한 얘기로 시작해서 자동차 기름 넣으라 했는데 안 넣은 얘기,
핸드폰 요금 내라고 준 돈으로 내가 만화책 빌려온 것까지 기억을 되살리며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앞에서 설명한 나의 정갈한 논리중에
환경보호에도 좋지 않다는 말은 지나친 해석이었던 것 같다.
평소에 환경에 대해 조금의 애착도 없던 내가 그런 말을 하니
일부 설득력이 있었던 논리마저도 겉으로만 곱게 포장된 변명으로 생각되어
이렇게 강한 역공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장난감에 들어가는 건전지와는 조금도 관련이 없을 것만 같은 이러한 얘기들을
결국 아기의 장난감으로 귀결시키는 아내의 궤변을 들으며
인터넷에 글을 써보라고 권해보려고 생각도 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끝까지 건전지 장난감이 아이에게 좋지 않은 점을
거듭 역설했으며 싸움이 커지면 곧 무력으로 승부를 겨루자고 할까봐
아무런 마무리를 내리지 못한 채 도망가듯 다른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내가 아는 아내는 항상 내 얘기에 반박을 하고 나선다.
하지만 그 반박은 그 순간에 답답한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는 정도고
실제로는 비교적 내 말을 잘 귀담아 듣고 멀지 않은 시기에 그것을 실천하곤 했다.
그렇긴 하지만 그것이 눈앞에서 당장 이루어지는 변화는 아니고 
시간이 조금 지나야 이루어지는 일일뿐이어서 당장 눈앞의 현실은 귀찮을 뿐이다.

 

 

      *          *          *

 

 

다음날 아침 작은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내에게 심한 말을 했다고 누나에게 상의하려 한 것이 아니라
간밤에 역설한 나의 해박한 논리에 스스로 감동한 나머지 누나에게 보충설명을 하는 동시에
부족한 지식을 보충 받으려는 사악한 발상이었다.
하지만 건전지 없는 장난감이 좋을 거라는 생각은 나만의 생각이었고
누나는 대뜸 전혀 상반된 얘기를 꺼냈다.


“에이, 그게 그럴 것 같지?...”

 

이렇게 시작된 누나의 얘기에 따르면 조카가 어렸을 때 볼링장에 데리고 간 이후로
누나는 조카에게 장난감 볼링 세트를 사주었다.
그러나 기계가 핀을 세우는 볼링장과는 달리 집에 볼링 핀을 세우는 기계가 있을 리 없는
누나는 조카 녀석이 매번 공을 굴려 볼링 핀을 쓰러뜨릴 때 마다
얼른 뛰어가서 볼링 핀을 세우곤 했다.
두번 세번 반복될수록 힘이 드는 것은 세곱 네곱으로 불어가는데 볼링을 하는 녀석은
그런 사실은 알 리가 없고 빨리 볼링핀을 세우지 않는다고 보채곤 했다.
그러면서 누나는 그런 사실이 매우 되돌리기 싫은 기억인 듯
어느 날 몰래 볼링 세트를 별로 친하지 않은 옆집에 선물로 주었다며
월남전에 참전한 기억을 더듬는 쌀집 아저씨의 말투로 담담히 얘기하고 있었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얼핏 생각하기만 해도 그야 말로 심각한 일이다.
카드 빚을 지더라도 차라리 건전지를 박스로 사다 두는게 낫지
매번 볼링핀을 세운다는 건 허리가 튼튼한 사람도 하기 힘든 일임이 분명했다.
매번 볼링핀을 세우느니 건전지 파는 동네 수퍼까지 마누라를 업고 뛰어갔다 오는 게
더 편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장난감에 대한 애들의 집착은 너무도 집요해서 재미를 느끼는 순간부터는
지칠 줄 모르고 놀기 때문에 아마 볼링핀을 세우는 일을
내가 여태까지 지하철을 탄 횟수만큼 반복해야 할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장난감 자동차가 아주 좋은 놀이문화로 생각되기 시작했다.
어차피 후연이도 머잖아 운전을 하게 될테니 자동차와 친해지는 것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니 어제의 논리는 다른 학파의 한 이론 정도로만 생각하도록 마무리하고,
설령 그 얘기가 안 통하더라도 내가 잘못 생각했다고 말하며 사건을 마무리한 다음
건전지를 많이 사다두는 것이 훨씬 편한 일이다.
이러한 논리의 혼란이 잠시 지나가고
얼른 건전지를 잔뜩 사들고 집에 들어가야 겠다는 생각을 머리속에 가득 담고 있었다.

 

 

    *         *          *

 

 

“후연아! 아빠 왔다!”


집에 가니 늘 그렇듯 아내하고 아들은 반갑게 나를 맞아준다.
누나와 통화한 얘기며 건전지 사온 얘기며 할 얘기가 잔뜩 있어
무슨 얘기부터 할까 잠시 망설이는데
아내는 뭐가 그리 반가운 지 싱글거리는 표정으로 말한다.

 

“마침 잘 왔어요. 할 일이 있으니 빨리 들어와봐요. 힘들어 죽겠네”


아내는 영문도 모르는 나를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오늘 새로운 장난감을 사왔다며 내게 자랑하듯 방안을 구경시켜주고 있었다.
그리고 한술 더 떠서 어제 내 말이 맞는 것 같다며 매우 흡족한 얼굴을 하며
어울리지 않는 아양을 떨고 있었다.
잠시 혼란스러웠던 정신을 차리고 방안을 둘러보니 방안에는
새로 사온 장난감 아닌 장난감이 발디딜 틈 없이 깔려 있었다.


매번 내 애기에 반박을 하면서도 항상 내말을 들어주는 아내가 고맙긴 하지만
가끔은 아내가 내 애기를 존중해주는 것이 전혀 반갑지 않을 때도 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불행하게도 현실에서 자주 접하게 되어
그때마다 나로 하여금 세치 혀의 신중함을 명심하게끔 한다.
그래도 그렇게 나마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니 아내는 내게 꼭 필요한 사람일까?

방안에는 새로 사온 도미노가 잔뜩 깔려 있었고
아들 녀석은 누군가의 무지막지한 노동력으로 인해 가지런히 세워진 도미노 행렬의
맨 앞줄 도미노를 얄밉게도 손가락 끝으로 톡 건드리고 있었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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