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하르방의 코를 잡으시면 아들, 턱을 잡고 찍으시면 딸입니다"
제주도 신혼여행지에서의 일이다.
사진사는 물론 여행가이드 역할까지 맡고 있는 택시 운전기사는
커다란 돌하르방 앞에 새색시를 세우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제주도를 찾는 많은 신혼여행객 때문에 생긴 새로운 풍습인 것 같았다.
아내는 남들이 흔히 하는 생각대로 하르방의 코를 잡았고
택시기사 또한 으레히 그러려는 표정으로 아무런 느낌없이
사진을 한장 찍었다. 그리고 이어서 다른 주문을 했다.
"자! 이번에는 턱을 잡고 한장!"
이것 또한 신혼여행지에서 생겨난 일종의 풍습인 것 같았다.
한장은 코를 잡고 찍고 또 한장은 턱을 잡고 찍고.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아내는 택시기사의 거듭된 요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듣는듯 마는듯 계속 코를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허허~ 이번엔 턱을 잡고 한장 찍으시지요"
택시기사는 이미 사진 찍을 준비를 훌륭히 마치고 있었음에도
아내는 집요하게 코를 잡고 늘어지고 있었다.
보다 못한 내가 나섰다.
"아, 이번엔 턱을 잡으라잖아?"
아내는 알듯모를 표정으로 무섭게 쏘아보더니
이내 싸늘한 표정으로 바뀌며 전설의 고향에서나 나옴직한
스산한 목소리로 택시기사에게 말했다.
"난 상관 없으니 그냥 사진이나 찍으세요....."
아니, 누가 사진 찍는데 남 걱정 하면서 찍나?
그리고 수퍼모델이나 포토제닉을 수상하려는 어떤 대회에
참여하는 사람도 사진작가의 말이면 꿈뻑 죽는데
수퍼모델도 아닌 아내는 택시기사를 위장한 사진작가(?)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한 채 같은 포즈를 계속 취하고 있었다.
"허허~ 그 자세는 아까 찍었잖습니까? 그러니 이번엔 턱을..."
조금 어이가 없다는 말투로 택시기사는 아내에게 말했다.
정말 누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일이다.
이것은 당연히 미신이겠지만 미신치는 아주 재미있는
가벼운 미신일 뿐이니 이를 맹신하려는 것도 이상하고 또한
한번 찍은 사진과 조금도 다름없는 자세로 또 한장의 사진을
찍겠다는 것도 상식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냥 찍으라면 찍으세요...."
하지만 아내의 표정은 몹시도 단호했으며 단호함을 지나쳐
비장함 마저 풍기고 있었다.
그 분위기로 보아 여기서 택시기사가 아내의 요구를 거절하고
사진을 찍지 않는다면 아내는 택시기사를 경찰청에 고발하거나
그 사람 이름으로 몰래 해병대 입대 신청서를 제출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돌하르방 옆에 3박4일 동안 세워둘 것 같았다.
수많은 신혼부부를 맞은 경험을 가졌을 것으로 예상되는
택시기사는 아내의 성격과 근력 및 지구력
그리고 전투력을 이미 파악했는지 계속 납득키 어렵다는 표정을
떨치지 못한 채 셔터를 눌렀다.
국내 제주도 신혼 여행 역사상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동자세 연속 두방의 사진 촬영 기록을 세운 것이다.
그때서야 아내는 몹시도 만족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른
행선지로 옮기자며 여느 새색시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변했다.
아내가 아들에 대한 욕심이 얼마나 강한지 처음으로
알게 된 일이었고 그 일은 살면서 계속 작은 부담으로 다가왔다.
막상 아들을 낳지 못하면 저 여자는 얼마나 실망을 할 것인가.
그리고 요즘 때가 어느 땐데 아들 딸 구별이 있는가.
아무래도 이건 살면서 적잖이 부담되는 일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결혼 하루만에 스쳐갔다.
그러다가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아내가 강원도 산골 출신이라
전통을 좀 더 오래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결론도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이나 또는 산동네 출신의 테러를 염려하여
쉽게 발설하지 못한 채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 * *
그 일이 있은 뒤 여덟 해가 지나서 아내는 둘째 아들을 낳았다.
첫 아이가 아들이어서 내심 딸이길 바랬지만
나의 기대와는 달리 어린 모습으로는 첫 아이와 얼핏 구분이
안가는 모습을 가진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건강한 아이를 낳았다는 안도감인지 아니면 자신의 바램대로
되었다는 표정인지 아내는 제법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수술실을 나왔고 나는 나대로 오래전에 있었던
제주도 신혼 여행지의 돌하르방을 기억하면서 새 생명의 건강을
빌고 있었다.
분명 지금의 이 시대에 아들 딸을 구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임은 물론이고 한마디로 말도 안되는 얘기다.
하지만 나는 아내를 충분히 이해한다.
제주도의 돌하르방 사건은 물론이고 아내가 그동안 살면서
보여온 그 집요한 집착과 노력으로 볼 때 이렇게 되는 것이
오히려 아내에게는 몹시 다행스럽다는 생각이다.
아들이던 딸이던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정해지는 것은 절대로
아닐테니 차라리 이 경우는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가.
아내는 무엇을 하던 생각한대로 꼭 이루려고 한다.
심지어 아들 낳는 일 마저도.
어떻게 생각하면 인간적인 냄새가 덜 풍기는 것도 같고
또 한편으로는 지나치다는 생각도 들기도 했지만
중간에 너무도 쉽게 포기를 잘하는 내 모습을 돌아보니
오히려 아내의 경우가 더 발전적인 것 같다.
그래서 포기를 특기로 알고 있는 나보다도
이제는 우리 아이들이 차라리 아내의 이런 집요한 성격을 닮았으면 한다.
그렇다고 아내가 남에게 피해를 주고 원망을 살만한 일에 욕심을
부리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아하누가
'힘센 마누라는 여자보다 아름답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변화 (0) | 2024.07.06 |
---|---|
잔소리 (0) | 2024.07.06 |
복비 (0) | 2024.07.06 |
가정의 평화는 내가 지킨다 (0) | 2024.07.06 |
미인은 잠꾸러기? (0) | 2024.07.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