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내일 같이 가요!”
전세 계약을 하러 가기 전날,
아내는 신이 난 어린애 처럼 조르듯 말을 건넨다.
“응? 내일 출근하지 않아?”
“출근이야 하지만 뭐 거기 다녀올 시간 못 내겠어요”
전세 계약이라는 것이 뭐 볼만한 구경거리가 있는 것도 아닐텐데
아내는 같이 가겠다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세 계약할 때 유승준이나 S.E.S가
축하공연을 했다는 애길 들은 적이 없는지라
아내가 굳이 가깝지 않은 길을 따라나서겠다는 것이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싸움이라도 벌어진다면 그야말로 든든한 아군이 되겠지만
전세 계약하면서 싸울 일이 있을 리가 있나.
그러니 굳이 아내와 같이 갈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아내는 계속 같이 가자고 한다.
글쎄... 아마도 힘들게 마련한 집이니
어떤 사람들이 이사오는지 궁금한 모양이다. 아니다.
그거야 굳이 전세 계약하는 날이 아니더라도 언제든 볼 수 있는 경우 아닌가?
그렇다면 왜 아내는 자꾸 전세 계약하는 자리까지 따라오려는 걸까?
“아니, 당신 뭐하러 피곤하게 올려구 하지?”
궁금 섞인 질문에 아내는 그냥 씨익 웃고 만다.
가끔 아내가 저렇게 웃을 때는 뭔가 비장의 카드가 있거나
아니면 획기적인 계획이 있을 때의 경운데
그 경우는 불행히도 늘 커다란 싸움으로 번지거나 아니면
4박5일간 열 받게 하는 일만 벌어지곤 했었다.
정말 아내는 왜 따라 나서려는 걸까?
단 한가지 의심가는 부분이 있다면 돈과 관련된 부분일텐데
그것도 별 일이 없지 않은가.
돈이야 이사올 세입자에게 받아서 이사가는 먼저 세입자에게
건네주면 그만일테고 ....
그러다 문득 뇌리를 스치는 선명한 두 글자의 단어가 떠올랐다.
복 비
그것이 바로 아내를 직접 부동산 계약 현장을 확인해야 하는 결정적인 이유였다.
* * *
“응? 그거? 음.... 25만원 정도 했던 것 같은데?”
아침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대충 부동산 사무실에 주어야 하는 복비를 물었다.
얼마전 같은 지역에서 비슷한 평수의 집으로 이사한 일이 있는
친구는 대충 그 정도의 돈을 복비로 주었을 거라며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그러면서 시간의 흐름에 따른 물가변동을 감안하여
30만원 정도 들어가지 않겠냐며 묻지도 않은 경제학적 분석까지 해주었다.
30만원이라.... 조금 아깝긴 하지만 그렇다고 소개해주고
계약을 성사시켜준 업소에 이것을 깎으려는 어떤 근거도 논리도 없는 것 같아
아내에게 30만원을 준비해 달라는 전화만 남기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아내가 일하는 사무실에 들러 아내를 태우고는 부동산 사무실로 향했다.
* * *
“여기 계약서 하고 잔금 있습니다”
전화로만 대화를 나누었던 부동산 사장은 그 인상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조짐이 심상치 않다.
기본적인 계약을 마치고 분위기가 복비에 대한
화제가 나오는 순서로 바뀜에따라 먼저 말을 꺼냈다.
“그리고... 복비는 얼마 드려야 하죠?”
내가 묻는 말에 기다렸다는듯 부동산 사장은 준비된 대답을 꺼낸다.
“30만원입니다”
그러려니 생각하고 있는데 드디어 아내가 나섰다.
“30만원이면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그저 으레히 나오는 말이려니 생각도 했고 아무 근거도 없지만
그래도 혹시 우격다짐으로 돈 5만원이라도 깍게 된다면
그게 어디냐는 심정으로 그저 아내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기로 했다.
부동산 사장은 뭔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표정으로
아내의 항의 섞인 질문은 애써 외면한 채
상대적으로 만만해 보이는 나와 계약을 치르려 서두르고 있었다.
아내가 너무 많다고 몇번 더 말을 건네자 부동산 주인은 귀찮다는 듯 말을 꺼냈다.
“그럼 아주머니는 얼마를 생각하시는데요?”
그러자 아내 또한 기다렸다는 듯이 준비한 대답을 했다.
“15만원이요. 왜요?”
부동산 사장의 표정은 더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뀌었고
나는 나대로 사태를 어떻게 진정시켜야 하는지 이리저리 눈치만 보고 있었다.
자그마치 50%를 깎은 15만원만 내는건 도무지 말이 안된다며
부동산 사장은 투덜거리며 일체 대응을 하지 않으려는 듯한 행동을 보였다.
하긴 1,20%도 아니고 반이나 뚝 잘랐으니 어느 누가 좋아하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뒤로 물러 설 아내는 절대 아니다.
무언가 초극단적인 행동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초강경 물리력을 동원할 것이다.
이럴 땐 그저 가만히 있는 게 좋다. 그럼, 그렇고 말고....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아내는 조용한 모습으로
들고온 가방을 열더니 주섬주섬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무엇을 찾을까? 나는 조심스레 생각했다.
총이나 칼을 꺼내서 너 죽고 나 죽자 하는 것은 당연히 아닐테고
아마도 전화기를 찾을 것이다.
요즘은 아내도 나이가 들었는지 예전처럼 호전적으로
상대하지 않고 조용히 처리하는 방향으로 그 취향을 바꾸었다.
얼마전에 동네 중국음식점에서 배기통을 낮게 달아
집으로 자장면 냄새가 너무 많이 들어온다며 짜증낼 때도,
예전 같으면 그 중국집으로 가서 단무지 뒤집어 엎으며 따졌을텐데
요즘은 그게 아니라 경찰서에 바로 전화해서 신고해버린다.
세월의 흐름과 시대의 변화에 따른 전술의 발전 차원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도 그렇게 처리하려는 것일까?
그런 순간에도 핸드폰으로 112를 누를때
지역번호를 먼저 눌러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112만 누르면
되는지를 생각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서
몹시도 마음 편한 가장이라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하지만 아내의 가방에서 나온 것은 총칼도 전화기도 아닌 복사된 종이 한장이었다.
어디선가 공인중개사 공부하는 사람의 참고서에 나온
복비 관련 부분을 복사해 왔다는데
우리가 계약할 집 가격 부분에는 보기에도 편하게
분홍색 형광펜으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
그 종이를 보면서 이제 모든 싸움과 계약은 끝이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아내라면 아무 근거도 없는 일도
억지를 쓰곤 하는데 저렇게 명확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데
과연 아내를 누가 이길 것인가?
아마 저 근거가 안통한다면 경찰은 물론 인근 군부대나 국립과학수사대,
MBC 시사매거진 2580, KBS추적 60분에 신고하는 것은 물론
인터폴, FBI 까지 신고할 것이다.
결국 예상했던 대로, 그리고 아내의 모든 계획은 순조롭게 마무리 되었다.
생각해보니 처음부터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게임이었던 셈이다.
다만 상황은 역전되어 조금만 더 달라고 사정하는
부동산 중개소 사장에게 아내는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선뜻 5만원을 더 주었을 뿐이다.
* * *
그리고 보니 아내도 많이 변했다.
시대의 변화에 순응할 줄도 알고 또 무조건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 모습을 종종 보니 말이다.
변화에 순응한다는 사실은 그리 나쁜 상황은 아니지만
왠지 허무하다. 그만큼 나이가 들었다는 생각 때문이다.
아들 후연이가 하루하루 커갈때면 그런 생각을 하곤 했는데
이젠 아내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
세월의 흐름이 주는 무상함은 무척 쓸쓸하기만 하다.
나 역시 이제는 시대의 변화에 순응해야 겠다.
나이가 자꾸 많아 지는 것이 더 이상 슬픈 일로 받아들여지지 않게 말이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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