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센 마누라는 여자보다 아름답다

미인은 잠꾸러기?

아하누가 2024. 7. 6. 01:40


 

“아 졸려, 이제 자야지. 내일은 쉬는 날이니까 일찍 자야겠다~”

 


아내가 졸립다며 잠자리에 든다.
늘 밤이면 항상 하는 말이지만 오늘은 왠지 생소하게 들린다.
아니, 생소할 뿐 아니라 뭔가 이상하게 들린다.
이상하고 생소하게 들리는 이유는 이렇다.

우선 얼핏 듣기엔 매우 평범한 대화 같지만 가만히 말뜻을 되새겨 보면
말도 안되는 얘기다. 내일 쉬는 날이라면 늦게 자겠다고 해야 정상이고
또한 맞는 표현이지, 내일 출근하지 않는다고 일찍 자겠다니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살다살다 별 이상한 사람도 다 본다.
그럼 평소에는 ‘내일은 출근하는 날이니까 더 일찍 자야지’ 라고 말하나?
참 이상한 일이기도 하다.

 

 

아내는 잠이 많다.

잠이 많은 정도가 아니라 잠이 무슨 인생의 목표라도 되는 양
집요한 목적 의식과 노력으로 잠을 잔다. 그에 대한 집착과 의지는 몹시도 대단하여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하다.
결혼한 지 불과 1주일이 안된 어느날 친구들이 집들이 하겠다며 집으로 찾아 왔다.
집들이는 주인이 하자고 해야 하는 것이 대한민국 곳곳에 퍼져 있는 일반적인 관습인데
이건 어찌된 일인지 친구들이 먼저 집들이 하자고 찾아온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집들이라는 것이 그리 어려울 것도 없다.
같이 밥 먹고 농담 주고 받다가 포커판이나 벌리면 되는 일이니 말이다.
그런데 그날 밤 사건이 발생했다.

 

밤 10시가 되기 무섭게 아내는 손님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잠자리에 든 것이다.
한참 포커를 치던 친구들은 몹시 의아스런 표정을 지었고
일부 다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친구는 독도가 일본땅이라고 우기는
일본 사람과 마주앉아 있는 듯이 분개한 표정도 지어 보였다.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설명해봐야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 같아
시간이 지나면 절로 알게 되겠지 라고 생각하며 애써 자세한 해석을 참고 있었다.
그날 밤 친구들은 몹시도 당황한 느낌으로 포커를 치고 헤어졌다.
하지만 그날 이후 아내를 이해하기 시작한 친구들은 우리 집이 포커를 하기에는
라스베가스에 있는 ‘시저스팔레스 호텔’보다 더 좋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뒤로는 허구헌 날 우리집에 모여서 포커를 쳤다.
밤 12시쯤 되어 과일을 깎아들고 들어와 마치 빨리 가라는 무언의 시위도 하지 않았으며
자신도 하겠다며 판에 끼어드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그저 다음날 아침에 지난밤 거둔 수익중 약간의 세금(?)만 바치면
모든 일은 쉽게 끝이 났다.


그 포커팀은 몇년을 계속 왔으며 급기야 아들 후연이가 세상에 나오기 하루 전날까지
우리집에서 포커를 치고 가는 전설적인 사건을 만들고야 말았다.

 


* * *

 


이렇듯 워낙 체질적으로 잠이 많은 아내의 관념에 불을 지른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모 화장품 회사 광고에 나온 ‘미인은 잠꾸러기’라는 카피였다.
화장품 광고야 이쁘다는 연예인들중에서도 특히 이쁘다는 사람을 모델로 쓰니
침을 흘리며 잠을 자던 콧구멍을 후비던 이쁘게 보이게 마련인데,
그렇다고 아무나 잠꾸러기 라고 미인이 되는 건 당연히 아니다.
또한 미인이 잠꾸러기라는 얘기지 잠꾸러기가 미인은 아니라고
골치 아픈 함수관계 따위의 수학적 용어를 대입해가며 아내의 희망찬 의지를
묵살시켰다가는 그 파장이 너무도 오래 갈 것만 같았다.


결국 아내는 그 광고의 카피를 평생의 격언으로 삼기를 결정한듯
평소보다 더 잠에 집착했으며 비가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집요하게 자야할 시간이면 잠을 잤다.
잠은 많이 잘수록 좋다는 생각도 보너스로 들었는지 어떻게든 시간만 나면
잠을 청하곤 했다. 가끔 그러면서도 혼자말로 잠이 모자라다고 중얼거릴 때는
벽에다 머리를 힘껏 박아버리고 싶은 충동도 일기도 했으나
다행히도 그런 사건은 없었다.
하지만 아내가 잠이 많다는 사실에 내게 있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가끔 늦은 시간까지 술자리에 어울릴 경우 친구들이 내게 묻는 말중
가장 많은 질문은 이렇다.

 

“너는 어째서 집에서 전화도 안오니?”

 


12시가 가까운 시간에 집에서 전화가 올 리가 없다.
그렇다고 그 시간에 내가 먼저 집에 전화하면 아내는 잠을 깨웠다고
히스테리를 부리거나 또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앙앙 소리를 내며 운다.
단지 잠을 깨웠다고.
보스니아의 어린 난민을 쳐다보고 있는 것처럼 운다.
이것도 상식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불가가의한 일이다.


 

* * *

 


아내는 잠이란 몹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며
또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집착하지 않는다.
내가 남들보다 부부싸움을 덜하는 이유는 신체적 열세에 의한 평화 협상 때문이 아니라
아내가 작은 일들에 대해 많은 기억력을 투자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끔씩 다투는 연인들을 지켜보면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내용이
세심한 여성의 기억력에 비해 남자의 기억력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만난지 며칠째 되는 날, 첫만남을 가진 장소, 처음으로 준 선물 등등
여자들은 많은 작은 것들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세세히 기억하지만
남자들은 그렇지 못하게 때문에 성의와 무성의를 두고 다투는 장면을 많이 보았다.
행여 내게 많은 미혼 여성들에게 무언가 한마디 할 기회가 있다면
나는 반드시 그런 말을 할 것 같다.
너무나 많은 것들에 하나하나 의미를 두지 말라고 말이다.
하지만 내게 언제 그런 기회가 올까.


 

아내는 세상에 중요한 것이 잠인 것처럼 또한 그밖에 중요하지 않은 일들에는
전혀 관심두지 않는다는 평소의 생활대로 오늘도 하루를 보낸다.
새 천년이 오고 뉴밀레니엄에 세기말이라는 단어가 최고조의 분위기를 만들던
1999년 12월 31일밤.


아내는 대망의 새천년을 불과 15분 남기고 늘 그랬던 것처럼 졸리다며 잠자리에 들었다.
세상에는 쉽게 이해하면서도 또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한번에 생기기도 하는 모양이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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