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조금 아는데 내가 가서 받아 올까요?”
권진원이라는 가수가 ‘살다보면’이라는 곡을 막 발표했을 무렵
아내와 함께 콘서트에 간 일이 있었다.
권진원이란 가수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멤버 이전이었던
강변가요제 입상(86년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부터 좋아했었다.
당시 ‘지난 여름밤의 이야기’라는 곡으로 은상을 받았는데
그곡이 매우 인상적으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었다.
마침 그날 콘서트에도 그 노래를 불러 잠시 오랜 추억에 잠기기도 했었다.
공연이 끝나고 나니 갑자기 싸인이 받고 싶어졌다.
연예인이나 운동 선수의 싸인을 받아본 일이 거의 없었으니
막상 싸인을 받는다는 일도 그리 쉽지 않은 일처럼 느껴지던 참이었다.
그런데 아내가 권진원이란 가수를 그전에 한번 만난 일이 있다며
싸인을 받아오겠다고 하니 이 얼마나 반가우면서도 놀라운 사실인가.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내가 가수 권진원과 알고 지내는 사이라는 사실이
전혀 믿겨지지 않았다.
처음의 얼핏 생각으로는 나이도 비슷하니
어린 시절에 같은 동네에서 자랐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가수 권진원이 어린 시절 강원도 산동네에서 개구리 잡아 먹고 메뚜기 잡아먹고
지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는지라
곧 그 의심은 재고할 일고의 가치가 없다는 현실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당신이 어떻게 알지?”
싸인을 받기 위해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다는 조급한 심정으로 급하게 물으니
아내의 대답이 걸작이다.
“지난번 롯데백화점에 갔다가 구두 파는데서 마주쳤다구요.
내가 권진원씨냐고 물으니 맞다고 해서 반갑게 인사했지요. 악수도 했는걸요?”
에이 씨앙! 그 정도를 가지고 알고 지내는 사이라고 얘기한다면
나는 차세대 대권주자인 모 국회의원과 같은 목욕탕에서 홀딱 벗고
같이 목욕한 적도 있는데 그럼 난 그 정치인과 불알 친구란 말인가?
뿐만 아니라 거래처에 들렀다가 그 거래처 사장 후배라는
개똥벌레의 작곡가 ‘한돌’씨랑 식사도 했으니 그럼 아주 친밀한 사이란 말인가?
도무지 씨알도 안먹히는 논리를 펴고 있는 아내였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 정도면 훌륭한 친분이니 십분 활용하라며
콘서트 프로그램과 볼펜을 쥐어주고 싸인을 받아오라 시켰다.
나로서는 몹시도 쑥스러울 것만 같게 느껴지는 싸인받는 일이
아내에겐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인듯, 들어가기에도 어색할 것 같은 출연자 대기실에
노크도 없이 ‘쑥’ 들어가더니 잠시후 ‘씩’ 웃으며 나타났다.
싸인받은 종이를 펄럭이는 아내에게 권진원씨가 알아 보더냐고 물으니
아주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고 입이 함지막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알아보긴 어떻게 알아 볼까. 그저 팬관리를 위해 기억하는 척 했거나 아니면
아내의 인상이 특별나서 기억나고 있을 뿐일게다.
아무튼 집에 있는 권진원 CD 표지에 권진원의 싸인을 끼워 두었다.
유명인에게,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싸인을 받는다는 일도
때로는 아주 유쾌한 일인 것 같다.
* * *
그리고 또 얼마의 시간이 흘러 ‘우리동네 사람들’이라는 포크 그룹의 콘서트에 갔었다.
84년인가? 대학가요제의 대상을 차지한 그룹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이 그룹은
별다른 활동은 없고 각자 생업에 종사하며 가끔씩 모여 노래도 하고
음반도 내는 그룹으로, 발표한 음반도 아직 한장밖에 없었다.
하지만 매니아들 사이에는 잘 알려진 그룹으로
고 김광석이 불러 망쳐버린 ‘서른 즈음에’라는 곡의 작곡자 강승원,
그리고 그룹 동물원의 유명한 ‘유준열’등 무려 7~8명의 멤버로 구성된 팀이었다.
평소에 늘 즐겨 듣던 음악인 <서른 즈음에>, <말하지 못한 내사랑>등
라이브 무대에서 직접 만나니 무척이나 새롭고 감동적이었다.
아마도 그래서 라이브 음악은 반드시 필요한 것만 같다.
공연이 끝나고 집으로 가야할 일만 남은 그 무렵, 아내는 이미 재미가 들었는지
이번엔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진해서 또 싸인을 받아오겠다고 나섰다.
지난번의 경우야 혹시 원치 않은 일을 내가 시켰다고 우길 수도 있었지만
이번의 경우야 자신이 먼저 하겠다고 나섰으니 혹시 이 일로 기분 상하는 일이 생겨도
내 잘못은 아니라는 치졸한 생각이 잠깐 스쳐갔다.
“여덟명 다 받아와야 겠죠?”
아내가 신이 난 목소리로 묻는다.
“그러면 좋지만 힘들지 않겠어? 그냥 대충 받아와.”
뭘 믿고 그러는지 아내의 모습은 몹시도 당당했으며 이미 한번 경험이 있어 친숙해진
대기실로 들어갔다.
지난번 권진원 콘서트보다는 시간이 다소 걸린 후에 나온 아내는
8명 전원의 싸인을 다 받았다고 좋아하고 있었다.
점잖은척 힐끔 쳐다보니 정말 여덟명이 한 종이 위에 가지런히 싸인을 했다.
무척 쉽지 않았을 것 같았는데....
아내의 말을 토대로 대기실 안에서 벌어진 상황을 정리해보니 대충 이러한 일들이 있었다.
<재연 - 대기실 안>
힘센마누라 : 자! 다들 여기로 모이세요!
멤버 일동 : (웅성거리며) 뭔데...뭐야?... 뭐지?
힘센마누라 : 자, 다 모였어요? 어? 저기 한사람 왜 안와요! 한멤버 : 예 갑니다.
힘센마누라 : (프로그램 종이를 펴며) 자 그럼...다같이 여기다 싸인을 합니다.
멤버 일동 : 이게 뭔데요?
힘센마누라 : 예 내가 싸인 받는 종이입니다. 왜요? 싫어요?
멤버 일동 : (어이가 없는듯) 아...아닙니다.
유준열 : (싸인을 하며) 근데 저희 그룹은 어떻게 아시죠?
힘센마누라 : 호호호 남편이 매우 좋아해요. 우리 남편은 우리동네 사람들하고 동물원 음악밖에 안 들어요...호호호 (이 부분은 내가 생각해도 가증스럽다)
유준열 : 음... 좋은 남편을 두셨군요.
힘센마누라 : 자! 이름을 이상하게 그리지 마시고 선명하게 해주세요. 어? 이분 누구에요. 다시 해주세요
멤버일동 : -_-;;;;;
그 이후 그 콘서트 말고도 다른 가수의 콘서트를 몇번 더 가긴 했지만
싸인을 받아온 일은 없었다.
대기실만 찾아가면 솔로 가수는 물론 그룹이 아니라 선명회 합창단이 발표회를 해도
전원의 싸인을 반드시 받아온다는 확신이 있으니
나도 모르는 새에 싸인이라는 것에 별로 아쉬운 것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 모양이다.
* * *
그리고 또 시간이 많이 지난 요즘. 참으로 이상하게 생각되는 일이 하나 있다.
이제 겨우 생후 33개월 지난 아들 후연이가 권진원 노래와 우리동네사람들 노래를
무척 즐겨 듣는다는 것이다. 이들의 CD만 틀면 찌개 끓는 목소리를 내며
얼굴에 핏발이 바짝 선 채 되지도 않는 목소리를 빽빽 질러가며 따라하는 것이다.
딱히 아내가 그런걸 일부러 가르칠 리도 없고 또한 후연이가
엄마 아빠가 사인을 받으러 다닌 일이 있던 가수라는 사실은
더더욱 알리가 없는데 말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녀석이 오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빽빽 소리내며 따라 부르면
집안의 분위기가 참 좋다.
엄마 아빠가 좋아하니 당연히 아들도 좋아해야 한다는
혈연에 얽매인 심정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무척 좋은 기분이 든다.
역시 좋은 노래와 이에 얽힌 추억들은 삶을 아름답게 그리고 풍요롭게 하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런 추억들을 되돌아 보게 될 때 부쩍 커버린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한다.
오디오에 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는 아들의 노래를 또 따라 부르는 아내를 바라보며
언뜻언뜻 나도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느끼곤 하니 말이다.
아하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