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전화 오면 집으로 전화해달라고 그래!”
일요일 오후, 백화점에 간다던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 핸드폰을 빌려주었는데 그 핸드폰으로 어떤 여자한테서 전화가 왔다는 것이다.
마침 모 라디오 방송국의 피디와 통화할 일이 있었던 참이었다.
웬 여잔가 생각하던 아내는 전화를 건 여자가 방송국 PD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가 생각하는 직업의 선호도에 방속국 PD는
꽤 상위그룹에 랭크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내는 곧 약한 모습을 보였고,
PD만 아니었다면 재미있는 일도 벌어질 뻔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별일 없이 지나가 버렸다.
“근데 왜 PD가 당신을 찾아요?”
백화점에서 돌아온 아내는 뭐가 그리 궁금한지 요목조목 캐물었다.
아직 한번도 통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라 나도 뭐가 뭔지 모르는데
이것저것 캐물으며 그것도 모른다고 하니 이야말로 답답한 일이었다.
그때 마침 집으로 그 방송국 PD로부터 전화가 왔다.
전화의 내용은 그 PD가 맡고 있는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에
원고를 써달라는 내용이었다.
방송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과 원고 쓰는 데 필요한 설명
그리고 원고료 등등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중에도
아내는 특유의 궁금증을 못참는 단순괴팍한 성격 때문에 자리를 뜨지 못하고
줄곧 내 통화를 귀담아 듣고 있었다.
통화가 끝나니 아내는 몹시도 만족스러운듯한 표정을 지으며 음흉한 목소리로 말했다.
“으흐흐... 부수입이 생기시는군...”
“근데 왜?”
“왜긴 뭐가 왜에요? 돈 생기면 좋은 일이지”
아내는 연신 신이 나는 목소리로 내가 원고를 써서 받아야 할 돈에 대한
분배의 원칙을 수학적으로 계산하며 내말을 받아넘기고 있었다.
그러더니 아내답지 않게 돈의 배분에 대한 제안을 했다.
“당신 7 가질래요? 3 가질래요?”
어라? 이게 무슨 말인가? 잠시 두가지의 혼돈에 빠졌다.
첫번째는 내가 벌었으니 다 내가 가져야 하는게 당연한데
이 대목에서 무슨 자신의 권리를 따지는냐는 당연한 의문이었고,
또 한가지는 평소에 모든 수입은 아내가 관리했으니
이번에도 다 가져간다 해도 할말이 없을텐데
왜 내 지분에 대한 배려까지 해주느냐는 첫번째 의문과는 상반된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해석은 아마 지금의 이 돈이 주수입이 아닌 부수입이므로
이에 대한 개인적 노력에 대한 댓가를 인정하겠다는 정치적인 면이 짙다고 생각되어
아내의 제안에 흔쾌히 응하기로 했다.
그리고는 생각해보니 아내의 생각이 이렇다면 당당하게 7을 요구해도
가능할 것만 같았다.
혹시라도 아내가 생트집을 잡으면 점잖게 양보해도 최소한 ‘3’이나 건지게 되니
그것도 할말한 장사라는 생각도 들었던 것이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가 7 하면 어때?”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조심스럽게 던진 내말에
아내는 근래에 보기드문 아주 호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큰소리로 좋다고 했다.
잠시 믿어지지 않는 순간이었다.
최소한 돈에 대한 것만큼은 한푼도 양보 안하는 아내가 이런 면을 보이다니
이는 실로 꿈인지 생신지를 다시 확인해봐야 할 것만 같은 그런 상황이었으며
하마터면 감동의 눈물을 흘릴 뻔하기도 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아내는 그런 나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당신이 7이니 나는 그럼 93이네...”
“....?!”
아니, 저게 무슨 얘긴가?
저 얘기는 내가 어디선가 우스개 코너에서 읽고 아내에게 재밌는 얘기라며 해주었던
바로 그 얘기 아닌가? 그 얘기를 실생활에 절묘하게, 그것도 유머도 아닌
실제 상황으로 응용하고 있다는 사실 아닌가?
그렇다면 그때의 애기도 아내는 우스개 소리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몹시도 적합한 수학적 배분이라고 생각했었다는 말인가?
아내의 평소 유머 감각으로 보아 분명 지금은 우스개 소리를 하는 것은
절대 아닌 것 같다.
우스개 얘기가 우스개로 전달되지 못하고 또한 그 얘기를 현실적으로 이용당해
상당히 불리한 지경을 맞고 있으니
아무래도 여러가지 커다란 손해를 입고 있는 것 같다.
결국 눈물겨운 사정 끝에 1:9라는 편파적인 배분으로 돈을 나누어 가지기로 했다.
어쩌다 세상이 이렇게 되었는지 어디가서 하소연할 상황도 아니지만
그래도 행여나 남이 물으면 아내에게 겨우 90%를 떼어주기로 했다고 말해야
그나마 가장의 권위가 설 것만 같다.
* * *
하지만 4달이 채 지나지 않아 방송 프로그램 개편으로
아쉽게도 내가 맡았던 그 코너가 없어졌다.
한편으론 90%나 되는 돈이 만져보지도 못하고 빠져나간다는 심리적 상실감으로부터
해소되어 알듯모를 좋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 소식을 듣고 금방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아내를 보니 어째 마음이 편치 않다.
가끔씩, 아주 가끔씩 아내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때 마다 마치 남의 집에 온 것 같은 사람처럼 낯설은 느낌이 들곤 한다.
아내는 항상 힘이 넘쳐야 한다. 그래야 아내답다.
항상 의욕이 넘치고 원기가 넘치는 것은 굳이 힘센마누라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좋은 모습 아닐까?
행여 그것이 가계에 또는 부부간에 얼굴을 붉히는 일이 될지언정
그래도 시무룩한 표정보다는 의욕있고 투지 넘치는 모습이 더 좋을 것 같다.
아무래도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옆집 아줌마랑 싸움이라도 붙여야 될려나 보다.
아하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