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벌금을 안냈다구요? 그럴리가 없는데...?”
출근하자마자 기분 나쁜 목소리의 남자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몇 개월 전에 신호위반을 한 적이 있는데 그에 대한 벌금을 물지 않아
자동차에 대한 재산 압류를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없었던 일이 갑자기 황당하게 생긴 것은 아니다.
아버님과 고모님을 모시고 모르는 길을 찾아가다가 그만 깜빡 신호를 못보고
지나간 적이 있었는데 한국 경찰답지 않은 기민함으로
기동대까지 쫓아와서 단속을 했었다.
당시 차에는 아내도 있어서 아내가 강짜도 부려보고 애교도 떨어보고 했지만
그 기동경찰은 거기까지 쫓아온 게 아까왔는지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딱지 한장을 떼었던 일이 있었다.
“아마 잘못 보셨을 겁니다. 다시 한번 확인하시죠?”
기분 나쁜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이렇게 말하니 그 사람은 몇번이나 확인했다며
벌금을 물던지 아니면 그냥 이대로 실력 행사를 하겠다는
아까의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나 역시 괜한 것을 가지고 시비를 걸자는 것은 아니었다.
아내는 그 특유의 성격상 벌금을 내야 한다거나 남에게 갚아야 할 것이 있는데
이를 바로바로 해결하지 못으면 밤에 잠을 못자고 데구르르 구르는
묘한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일명 휘발류라고도 칭하는 이런 성격의 소유자는 치뤄야 할 일들을 못 치루었을 때
혈관이 팽창하고 동공이 확대되며 심장박동수가 빨라지기 때문에
그리 많지 않은 벌금을 안내면서 그런 고통을 참고 있었을 리는 만무하다.
따라서 당연히 벌금을 내었을텐데도 그 기분 나쁜 목소리의 주인공은
여전히 찌개 끓는 목소리를 내며 협박에 가까운 통보를 하고 있었다.
기분이 몹시 나빴지만 한편으론 쾌재를 불렀다.
그 틈에 생각한 머릿속의 생각을 순서대로 정리하면 이렇다.
1. 너 우리 마누라한테 이른다.
2. 그럼 우리 마누라 광분한다. 아니, 방방 뜬다.
3. 고로 넌 이제 죽었다.
확인하고 전화하겠다며 담당자의 이름과 전화를 번호를 적고 얼른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마치 동네 애들에게 얻어맞고 집으로 뛰어와 형을 찾는 어린 애처럼
아내에게 황급히 전화를 걸었다.
“여보! 지난번에 딱지 뗀거 돈 냈지?”
“당연하지... 근데 왜요?”
그리고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전화기 너머로 ‘뽀드득’하는 소리가 났다.
아마 주먹을 불끈 쥐거나 이빨을 굳게 다무는 소리였음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얼른 전화번호와 이름을 말해줬다.
두세번 확인하는 아내의 말투는 마치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이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쪽바리와 전쟁에 임하던 그런 결전의 각오처럼 느껴졌다.
또한 주로 소설이나 역사책을 보면 전쟁터에 나가는 남편을 위해
여자들이 기도를 했다는 얘기는 자주 봤지만
이런 경우는 잘못돼도 뭐가 한참 잘못된 것이 아닐까 조금 의문이 갔다.
하지만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시덥잖은 진부한 표현으로
이에 대한 개념을 애써 무마시키고 있었다.
* * *
그 뒤의 일은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하리라는 생각된다.
아마 그 정도의 상대에게는 필살의 신무기도 필요하지 않으며
새로운 전략 또한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하던 대로, 늘 그랬던 것처럼만 하면 모든 일이 잘 마무리 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후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 참...기가 막혀서... 아 글쎄 따질 걸 따져야지...어휴~”
투덜거리는 아내의 말투였지만 일은 간단히 마무리가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조심스럽게 물으니 아내는 한번 호탕하게 웃더니
이내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한다.
“허허허...직장생활 계속 하고 싶지 않냐고 물었죠...”
그말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마 예상대로 한참이나 큰소리를 쳐대며 방방 떴을 것이다.
또한 상대방의 명백한 과실을 확인한 상태니 큰소리를 쳐대는 목소리에는
넉넉한 여유와 온갖 자신감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잠시후 아까의 그 담당 직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업무 처리에 오류가 있었던 것 같다며 사과의 뜻을 전해왔다.
오류를 잡아서 정상으로 처리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전화였다.
물론 처음부터 아무 걱정 안했는데 그 사람은 뭐가 그리 걱정이었는지
아까의 기분 나쁜 목소리와는 정반대로 아주 고분고분하고 친절한 목소리로
몇번씩 그 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가끔은 싸움 잘 하고 따질 것 잘 따지는 아내가 듬직하게 느껴진다.
물론 그것이 지금의 경우처럼 공통의 적을 상대하며 힘을 발휘했을 때나
흐뭇한 느낌이지 서로 웬수가 되어 싸울 때는 그리 반가운 현상도 아닌 것도 사실이지만.
아무튼 만화같은 해프닝으로 끝난 그날의 얘기는 훗날 부부 사이에
아주 오랫동안 화제거리로 남는 사건이 되었다.
가만히 생각하면 다른 가정도 아니고 내가 사는 가정에서는 어쩌면 아무렇지도 않은
사건일 수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 얘기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일이 되었다.
지금까지의 얘기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와 아직 내지 않은 범칙금 통지서가 발견되고부터의 얘기가 말이다.
아하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