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센 마누라는 여자보다 아름답다

아내의 얼굴

아하누가 2024. 7. 5. 01:26


 

1. 가장 희망에 찬 얼굴

 

어떤 다이어트 식품에 대한 광고를 기획한 적이 있다.
과일과 야채를 자연발효시킨 식품을 밥 대신 먹는 것으로 충분한 영양을 공급해주어
밥을 먹지 않아도 생활에는 지장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인체내 노폐물을 말끔이 제거해줌으로써 다이어트는 물론
체질의 개선에도 도움을 주는 제품이었다.
다만 식사를 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공복감을 견디기 힘든 것 또한
당연한 사실이었다.


광고를 위해 그 제품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하다보니(광고를 해주려면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한다) 꽤 괜찮은 제품이라는 확신이 들어
그 회사 사장에게 내가 직접 해보겠노라고 했다.
그 회사 사장은 무척 대견한 표정을 지었고 그 표정을 보며 나도 무언가 한건 했다는
근거없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10일 이상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는게 어디 쉬운 일인가?
평소에는 무엇을 먹을까 고민을 했었지
이렇게 무엇을 안 먹으려고 고민하긴 아마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오랫동안 고민하다 문득 밥 잘 먹는 아내가 생각났다.
그런 순간에 아내를 생각해낸 내가 공처가인지 아니면 아주 질나쁜 남편인지
잠시 헷갈리기도 했지만 그것 차후의 문제였고,
당장은 임상실험이 최우선이라는 생각에 모든 도덕적 문제를 억지로 망각하기로 하고
아내에게 다이어트를 권했다.
다이어트에 눈이 먼 아내는 나의 전략적 속셈도 모르고
자상한 남편으로 생각하며 감동어린 표정까지 지으며 고맙게도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그것도 유치원생 같이 하라는대로 아주 성실히 실행했다.

 

 

아내가 식사를 중지한지 5일쯤 되었을까?
어느날은 양배추와 오이를 잔뜩 사들고 들어 왔다.
그게 뭐냐고 물으니 아내는 회심의 미소를 띤채, 복용설명서에 양배추나 오이 등
간단한 야채를 곁들여도 된다는 문구가 있다며
양배추 2개와 오이 10개가 들어 있은 봉투를 식탁위에 올려 놓았다.
아마 한번에 다 먹어치울 분위기였다.

 


바로 그때의 아내 얼굴을 잊지 못한다. 환희와 희망이 가득찬 얼굴,
마치 절망속에서 한줄기 빛이라도 발견한 그 기쁨에 찬 얼굴......
여태껏 지내면서 본 표정중 가장 희망에 찬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효과가 엄청나게 떨어진다는, 확실치도 않은 내 말에
곧 그 희망의 얼굴은 절망의 얼굴로 변하고 말았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러 아내는 무려 한달이나 다이어트 프로그램을 실천했고
워낙 강골인 체질 때문인지 체중은 그리 많이 줄어들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제법 만족하는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광고 모델로 써야 할 것 같다. ‘밥을 안먹어도 힘은 남아있다!’ 라는
광고 문구로 아내가 냉장고라도 번쩍 드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으려는 생각을 하고 있자니
나도 어지간히 웃긴 놈이며 또한 동시에 질나쁜 남편이 맞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2. 가장 무서운 얼굴

 

난 겁이 많은 편이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이 귀신을 제일 무서워 한다.
어떻게 군대생활을 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아찔해지기도 하니 말이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3층 짜리 다세대 주택인데
처음에는 내가 살고 있는 2층만 입주했었다.
아직 3층은 마무리가 안되었고 반지하인 1층은 시멘트와 건축자재들이 잔뜩
널브러져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 어느 늦은 밤 아내는 지하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며 날 보고
내려가 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겁 많은 내가 이 밤중에 귀신이라도 튀어 나올 것 같은
그 험악한 지하실에 내려간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래서 아무 소리도 안났는데 왜 그러냐며 억지로 못들은 척 하고
오지도 않는 잠을 억지로 자는척 했다.
하도 잔소리가 심하길래 대충 나가는 척만 하고 다시 들어오려는 생각으로
문을 나서려는데 성질 급한 아내가 직접 나섰다.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지만 그래도 명색이 가장인데 모른척 할 수도 없어
조심스럽게 아내 뒤를 졸졸 따라갔다.
아내는 그냥 나서는게 섭섭했던지 커다란 삽을 들더니
오뉴월 보신탕용 개를 때려잡기라도 하는 듯한 자세를 하고 지하실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지하실을 이리저리 둘러보고는 문밖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는 나를 향해
말했다.


“음...아무 것도 없군....흐흐흐”


바로 그때, 아내의 얼굴을 기억한다.
뭐라도 나왔으면 삽자루를 이소룡이 쌍절곤 돌리듯이 날려 버리려는 모습을 하며
아무 것도 없었음을 못내 아쉬워 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난 그때 새로운 사실도 하나 알게 되었다.
이 세상엔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것도 있다는 사실 말이다.

 


3. 가장 의문에 찬 얼굴

 

예전에 다니던 직장이 있던 건물에 산부인과가 있었다.
의사는 젊은 남자였는데 서글서글한 성격이어서 곧 친해졌고
업무가 끝나고, 진료가 끝나면 가끔 만나 바둑도 두고 술도 한잔 하며
각자의 세계에 얽힌 얘기들을 주고 받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약한 감기 기운이 있어 콜록거리는 걸 본 그 의사가
나를 위해 지었다며 약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참 지금 생각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일이었다.
뭐 아무리 산부인과 의사라고 하지만 감기약 하나 짓지 못하리라는 생각은
누구도 안할테니 말이다.


그래서 그 약을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넣고 집에 들어가 소지품 꺼내어 놓는 화장대 위에
올려 놓았는데 아침에 아내가 그것을 보게 되었다.

 


“여보! 이게 도대체 무슨 약이유?”
“응? 감기약인데 왜?”
“아니, 무슨 감기약을 산부인과에서 지어주남?”

 


그렇다.
약 봉투는 <안 산부인과>라는 병원 이름이 찍혀있는 봉투였고
속에 포장된 약에도 하나하나 <안 산부인과>라는 병원명이 찍혀져 있었다.
바로 그때, 난 가장 의아스러워하며 궁금증 섞인 아내의 얼굴을 보았다.
도대체 아내는 그 약을 무슨 약으로 생각했을까?
애 낳는약? 아니, 그런 건 없을테고 그렇다면 아들 낳는약?
그것도 아니라면 남자가 임신하는 약?
그리고 나서 몇년뒤에 정말 아들을 낳았으니 아마 아직도 아내의 헷갈림은
보통의 차원은 분명 넘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아내에게 그 약 구해달라는 사람이 없는 걸 보니
어디 가서 자랑은 하지 않은 모양이다.


 

* * *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아내의 얼굴은 자고 있을 때가 제일 행복해 보인다.
직장 다니며 아기 키우려니 무척이나 힘든 모양인지 천하의 힘센 마누라도
잘 때는 헬렐레한 표정으로 정신없이 잔다.
요즘은 아들 후연이까지 한사람 몫 한다고 엄마의 커다란 넓적다리에 머리를 기대어
마찬가지로 헬렐레한 모습으로 잠을 자고 있다.
저 녀석이 몇살이 되면 엄마 옆에서 안자고 혼자서 자려고 할까.....
그때는 나라도 넓적다리에 기대서 멍청하지만 그래도 행복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자야겠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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