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오늘부터 휴가라면서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첫 출산을 앞두고 배가 남산만해진 아내가
결국 회사에 출산휴가를 낸 바로 그날의 일이다.
직장에 다니는 아내는 출산 예정일이 무려 일주일이나 지났는데도
자동차를 직접 운전하며 출퇴근을 했었다.
그리고 출산휴가가 시작되는 날 아침에 눈을 어슴츠레 떴을 때
아내는 이미 외출준비를 서두르고 있기에 서둘러 물었다.
아내는 그리 대수롭지 않으면서도 시큰둥한 목소리로 내 기억에 가장 또렷하게,
그리고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만한 황당한 대답을 했다.
“응.....애 낳으러....”
아내는 자동차 열쇠를 들고 직접 운전해서 병원으로 가겠다고 한다.
더 이상 기다리기 싫다는 얘기를 간밤에 했던지라
아마도 오늘은 반드시 낳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와 특유의 급한 성격이 맞물려
국내 출산 역사상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본인 자가운전 병원도착 출산방식’의
기록을 세울 것만 같았다.
도저히 그 모습을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어서 황급히 차려 입고
아내와 함께 병원을 향해 집을 나섰다.
아무래도 느낌으로 보나 증상으로 보나 또한 시기적으로 보나
그날은 아기를 낳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천하의 힘센 마누라라도 처음 경험하는 순간이니 알지못할
두려운 생각으로 가득 할 것이라 생각하며 무언가 해줄 말이 없는지
잠시 옛 기억을 더듬어 보다가 문득 어머니에 관한 일화 하나가 생각났다.
* * *
중학교에 다닐 무렵이었으니 꽤 오래전 일이다.
같은 반 친구들 하고 야구를 하다가 야구 방망이에 눈을 얻어 맞고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적이 있었다.
너무나 놀래고 당황했지만 그래도 집에 연락을 하는게 순서인 것 같아
중학교 1학년 나이답지 않은 계획을 세운 뒤 집앞에 잘 아는 병원으로 향하고
다른 친구들은 우리 어머니께 전화로 연락했다.
뜬금없는 소식에 놀라신 어머님은 곧장 병원으로 달려 오셨다.
하지만 눈이 다친 게 아니고 눈 위의 눈썹 부분 살갖이 찢어진 걸 잠깐 확인하시고는
같이 야구한 친구들에게 마치 취조하는 안기부 직원처럼
자초지종 상황을 들으시더니 공을 받는 포수의 얼굴을 가리는 장비가 없었다는
사실을 아시게 되었다.
하긴 그 당시에 그런 장비를 갖추고 있을 리가 없었다.
유격수하던 친구도 잘해서가 아니라
그가 유일하게 야구방망이를 가지고 있던 놈이었기 때문이었고 기름집 창선이도
축구공 하나 있다는 이유만으로 축구도 못하는 놈이 항상 센타포드를 했었다.
얘기를 들으신 어머니는 친구들을 데리고 동네 체육사로 가시고는
야구 장비 일체를 사주셨다.
사실 우리집에는 어머님이 친구들에게 그렇게 손 큰 아줌마처럼
돈을 팡팡 쓸만한 여유가 없었는데도 어머님은 대담하시게도 큰 손을 휘두르셨다.
하지만 내가 더 놀란 것은 그게 아니었다.
어머님께서 친구들에게 야구 장비를 사주시는 동안 나는 병원에 홀로 누워
눈위를 4바늘이나 꿰매는 대수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겁이 많은 중학교 1학년 나이로는 두려운 것은 물론 섭섭하기 그지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꽤 많이 흘렀을 때도 왜 어머님이 수술하는 나와 같이 있지 않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머니는 적어도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고
어렴풋이 느끼고만 있었을 뿐이었다.
* * *
병원에서 아기가 커서 순산은 어렵겠다는 의사의 말에 아내는
무척이나 긴장하고 있었다.
병원이라는 데는 참으로 이상한 곳이어서 수술하다가 일어난 사고에 대해
남편보고 책임을 지라며 싸인을 요구한다.
내가 수술하나? 어이가 없는 일이지만 그 상황에서는 어쩔 수가 없는 일이기도 했다.
싸인을 하고 나서 곰곰히 생각해 보니 이것도 아기를 만든(?) 책임인가? 하는
묘한 웃음도 나왔다.
그러는 동안에 아내는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수술용 침대에서
수술 일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긴장과 불안의 표정이 역력했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은 그 순간에 오는 길에 생각난 중학교 시절의
우리 어머님의 이야기를 아내에게 차분하게 했다.
그말을 아내에게 하면서야 비로소 오래전 어머님의 마음을 절실하게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강한 아들을 키우고 싶으셨고, 또 강한 어머니로 보여지길 원하셨던 것이다.
아내는 고맙게도 강한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는 내 말을 잘 받아 들였다.
그리고는 잠시후 건강한 아들 녀석이 불쑥 나타났다. 수술실에서 나오는 아내는
헬쓱한 얼굴이었지만 이젠 제법 용기를 얻었는지 이렇게 말했다.
“이제 아들하고 바둑둘 수 있지?”
아마도 아내는 강한 어머니가 되어서 아들을 강하게 키우게 될 것이다.
* * *
어느덧 시간은 훌쩍 지나가 버려 아들 후연이는 이제 걷는 것은 물론 제법 뛰기도 한다.
언젠가 이 녀석이 훌쩍 커버려 말귀를 알아들을 나이가 되면
그 얘기를 꼭 해주고 싶다. 하지만 그 역할 또한 아내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할 것 같다.
아하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