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전에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있게 되었습니다.
심심해서 친구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대충 방이라도 청소하려는데 갑자기 바퀴벌레 한마리가
방안을 가로질러 도망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다른 일은 참더라도 바퀴벌레 잡는 일을 참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무언가 때려잡을 만한 것을 찾았습니다만 아쉽게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눈에 띄인 것은 3M에서 나온 스카치테이프뿐이었습니다.
그 테이프를 쭉~푸른 뒤 그것으로 방바닥을 지나가는 놈을 위에서 덮쳤습니다.
그러니까 방바닥하고 스카치테이프사이에 끼어 꼼짝 못하게 된 거지요.
그 바퀴벌레는 어떻게든 도망가려고 무던히도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들여다보니 발버둥치는 모습이 꽤 재미있었습니다.
등에 스카치테이프가 붙어서 전진하진 못했지만 발들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이걸 잘 개발하면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보다 더 인기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람쥐보단 덜 먹고 공간도 덜 차지하니 더 경제성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때 친구들이 놀러왔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방안으로 들어온 친구들이 그 바퀴벌레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방바닥에 붙은 바퀴벌레를 보던 그 눈빛 그대로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더니 여러 놈이서 마치 합창을 하듯이 말했습니다.
“혼자 있을 땐 주로 이렇게 노니?”
그리고 그날 이후로 내게는 ‘변태’라는 별명이 생겼습니다.
아니, 이게 어떻게 변태입니까?
바퀴벌레 잡으려고 노력하던 중이었는데 이것도 변태란 말입니까?
2.
친구들끼리 얘기를 하다가 어느 연예인이 제일 좋으냐는 주제가 화제가 되었습니다.
주로 고소영이나 김희선 등이 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고
그 뒤를 더 신세대 연예인 몇몇이 경합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 때 문득 누군가 내게 누굴 제일 좋아하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담담히 의사를 말했지요.
“혜은이....”
사실 혜은이라는 가수가 전국을 강타할 때 그 인기는 한마디로 캡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내가 중학생이었고 또한 워낙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서
감히 좋아한다는 말을 꺼낼 수도 없었지요.
근데 이제는 아줌마가 되서 많은 사람이 잊고 있으니 이제 슬슬 본격적으로 좋아한다고
말하기로 했던 것이었습니다.
오랜 의리에 놀랬고 그것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는 탁월한 기억력에
스스로도 감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친구들은 번갈아 가면서 나를 한번씩 쳐다보더니 한마디씩 했는데
모두 같은 말이었습니다.
“거봐! 얘 변태 확실하다니까!”
아니, 좋아하는 연예인 말하라 그래서 말했는데 내가 왜 변탭니까?
그리고 혜은이 아줌마가 어디가 어떻다는 겁니까?
좋아하는 사람을 오래 좋아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 아닙니까? 그런데도 내가 변탭니까?
3.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이상한 일거리 하나가 들어왔습니다.
비디오 테이프의 표지 디자인이었는데 표지 사진에 나오는 여주인공들이
윗옷을 하나도 안입었다고 심의에 걸렸답니다. 사실 영화보면 정말 하나도 안 입는답니다.
그런데도 심의위원회에서는 만들어서라도 옷을 입혀 오라며 돌려 보냈다는 거죠.
그래서 제게 가져오게 된 겁니다.
하지만 속옷을 입힌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본적은 잊지만 그려 넣을 만큼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았던 거지요. 하는 수 없이 여직원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저기요~ 영자씨... 브라자 좀 보여줄래요?”
갑자기 여직원이 울면서 나갔습니다. 사무실이 혼란으로 가득했습니다.
영문을 몰라 하던 일이나 계속하자니 사람들이 여직원이 우는 소리를 듣고
우리 방으로 와서 내가 하고 있는 작업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다들 내게 변태 아니냐고 손가락질 했습니다. 세상에.... 내가 왜 변태입니까?
맡은 일 충실하자는 사람이 왜 변태입니까?
4.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다가 바지 지퍼가 고장났습니다.
아무리 고쳐보려 해도 고쳐지지 않습니다.
하는 수 없이 긴 윗옷을 이용해 대충 가리고 나왔습니다.
무언가 허전했지만 왠지 통풍이 잘 되는 것 같아 시원한 맛에 그 짓도 할만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근데 그날은 저녁 친구들을 만나 어디론가 다른 곳으로 가야 했었습니다.
그래서 한 친구 차에 몸을 싣고 이동을 하려는데 길거리에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운전하던 친구는 싸움 구경하고 불 구경은 산수갑산을 가더라도 꼭 해야 한다며
차를 세웠습니다. 난 별로 보기 싫었지만 내 차가 아니어서 하는 수 없이
차안에서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고장난 지퍼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조그만 승용차 뒷좌석에서 부지런히 바지 지퍼를 매만지고 있었습니다.
조금만 노력하면 빠진 고리가 연결될 것도 같았습니다.
정신없이 그 작업을 하는데 마침 친구들이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더니 조금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습니다.
“넌 남들이 싸우는 걸 보면 성욕이 생기니?”
아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습니까? 바지 지퍼 고치려는데 이걸 가지고 변태라 한다면
클린턴은 뭡니까? 이래도 내가 변태입니까?
5.
앞의 몇가지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나는 변태가 아닙니다.
나는 그저 내가 해야 할 일만 했을 뿐입니다.
변태는 주로 주변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그런 개념에선
요즘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왕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아침에 자동판매기를 이용해서 전철표를 사는데 유심히 보니
작동 방법에 대한 안내문은 한글과 영어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나라를 찾는 가장 많은 수효의 외국인은 일본인일 텐데 일본어나 한문은 없었습니다.
처음엔 아쉽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것도 제법 기분이 좋은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생각을 한거지요.
‘그래, 니들도 남의 나라 올려면 한글 몇개는 읽을 줄 알고 와야지’
그리고 쪽빠리들이 고생할 거 생각하니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일본말 안내문이 없다는 사실에 또한 기분이 묘하게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사무실에 돌아와 동료들에게 이 얘기를 하니 다 나를 소 닭보듯이 쳐다봤습니다.
기분 좋지 않냐고 물어도 시큰둥했습니다. 하지만 난 그들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기분은 좋지만 내색을 하지 않는 것일 거라고 말이죠. 그리고 하루종일 그 생각만 했습니다.
기분이 좋으면서도, 또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닌 척 해야 하는거....
이거 과연 옳은 생각일까?
아마도 그렇다면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변태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