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글 긴 얘기

주민등록번호

아하누가 2024. 7. 5. 01:21



1.

인터넷이 생활화되다 보니 한 사이트에 아이디가 두 개 이상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타인 명의의 아이디를 이용해 나쁜 일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반드시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두 개 이상이 있어야 할 경우는 종종 있게 마련입니다.
주로 게임이나 바둑 사이트에서 정해진 한계를 다 사용했을 때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유료가입은 싫고 무료로 이용은 해야겠는데 무언가 모자란 경우죠.
그럴 때 보통의 경우에는 게임에 관심없는 옆자리 동료나 친구에게 주민등록번호를 물어
새로운 아이디를 만들어 사용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언젠가 인터넷에 주민등록생성기라는 프로그램이 돌아다녀
그것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전부터는 대부분의 사이트에서 주민등록번호와 실명을 확인해야
가입이 되는 시스템으로 바뀌면서 주민등록생성기는 아무런 역할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2.

가까운 사람 중에 채팅의 귀재가 있습니다.
틈만 나면 채팅을 하는데 그 정도 했으면 질릴 만도 한데
아직도 열심히 채팅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가끔 무슨 얘길 나누는지 화면을 힐끗 훔쳐보면 대부분 욕설과 험한 말이 난무하는
황당한 분위기만 보였습니다.
채팅을 많이 하다보니 정상적인 대화는 아무 느낌이 없고
데이트하는 커플을 방해한다거나 또는 그 동안에 쌓인 내공을 이용해
채팅방을 어지럽히는 불량사용자에게 정의의 심판을 내리는 일에
더 재미를 느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해당 사이트로부터 수없이 많은 제명을 당했습니다.
그런데도 늘 새로운 회원으로 가입하여 종전에 하던 일들을 계속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도대체 그 많은 주민등록번호와 이름이 어디서 나와?"

 

그러자 그는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매우 행복한 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다운로드했다는 자료를 내게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다운로드했다는 자료는 어느 시험에 합격한 합격자 명단이었습니다.
주민등록번호와 이름이 고맙게도 수백명이 나열되어 있었습니다.
행복한 표정이 나올만 했습니다. 정말 기발한 발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를 채팅의 귀재로 임명했습니다.

 

 

 

3.

시간이 제법 지난 뒤 친구 용모를 만났습니다.
매일 인터넷에서 포커를 치면서 매일 나오는 포커사용 금액이 너무 빨리 떨어진다며
새로운 아이디, 즉 새로운 주민등록번호를 아쉬워하던 친구였습니다.
예전에 채팅의 귀재를 통해 알게 된 그 방법이 생각나 이를 설명하자
용모는 무릎을 쳤습니다.
그리고 얼른 인터넷을 통해 '합격자 명단'을 검색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서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건지
합격자 명단엔 주민등록번호가 끝까지 게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약간 허탈해졌습니다.
하지만 노력의 대가인 친구 용모는 약간의 인내력을 발휘하여
기어코 주민등록번호가 나온 합격자 명단을 찾고야 말았습니다. 대단한 집중력이었습니다.
그러나 매우 좋아하던 것도 잠시 용모는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야, 근데 이거 아무렇게나 써도 되냐?"

 

녀석이 찾았다는 합격자 명단을 보니 '경찰채용시험 합격자 명단'이었습니다.
결국 녀석은 타인의 주민등록번호 불법사용 계획을 잠시 중단했습니다.

 

 

 

4.

며칠 뒤 신문에서 반가운 기사를 보았습니다. 얼른 용모에게 전화했습니다.

 

"야, 얼른 받아 적어. 42072X-1021XXX 권무X. 오케?"
"그거 뭔데?"
"너 지난번에 게임사이트 가입할 주민등록번호 필요하다며?"

 

녀석은 그때서야 알아채고 고맙다며 얼른 받아 적었습니다.
그 주민등록번호는 어떻게 된 거냐구요?
신문을 유심히 보시면 아시겠지만 기사중 나오는 명함 크기의 광고 (돌출광고)중
많은 광고가 현상수배에 대한 광고입니다.
사람 사진 나오고 이름 나오고 인상착의 나오고 주민등록번호 나옵니다.
신고하면 준다는 사례금도 나옵니다.
문득 그 광고를 보니 친구 용모가 생각났습니다.
아직까지 용모 신상에 아무 일이 없는 걸 보니 이미 그 범인이 잡힌 것 같습니다.

 

 

 

5.

이번 이야기는 제법 오래전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당시 상황이 매우 재미있었고 유머로서의 구성 요소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던 실화입니다.
그런데 막상 글로 옮기려니 쉽지 않았습니다.
자칫하면 타인의 주민등록번호를 도용하는 것이 희화화되어
죄의식이 희석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타인의 주민등록번호를 이용한다는 것 자체가 옳은 일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고
그것을 이용해서 하는 일도 당연히 당당한 일은 아니겠지요.
그러기에 법 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양심인가 봅니다.
남의 주민등록번호로 장난친 적이 있는 사람들은 이 기회에 다 반성합시다.

나도 나쁜 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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