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유철이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늘 재치가 넘치고 순발력이 좋은 친구였는데
친구라는 단어가 걸맞게도 서로는 뛰어난 호흡을 맞추던,
한마디로 죽이 잘 맞는 사이였습니다.
하루는 이 친구가 내가 일하던 회사로 찾아왔습니다.
내가 일하는 회사의 부서는 3명의 직원이 한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 작은 부서였습니다.
그날따라 한명이 휴가를 낸 상태라 회사앞 커피숍에서 만나지 않고
그냥 사무실로 찾아 오라고 했습니다.
노크 소리가 나고 문을 열고 들어온 친구는 자연스럽게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능청을 떨었고 나 역시 이에 질세라 ‘반갑습니다. 어서오세요’라고 하며,
마치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한술 더 떠서 한마디 했습니다.
“이력서는 가지고 오셨지요?”
“아~ 예...제가 그만.... 오늘은 그저 면담만 하는줄 알고....”
척~ 하면 다 알아듣는, 아무 각본도 아무런 사전 계획도 없이 죽이 맞아 떨어지는
친구였으니 당연히 그런 대답이 나왔겠지요. 대화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아니 이력서를 안가오면 어떻게 합니까?”
“안 가져올 수도 있지 뭘 그럽니까?”
“안 가져오고 왜 큰 소리야?”
“내가 언제 큰 소리 쳤나? 당신이 지랄했지?”
“뭐? 지랄?”
그리고는 둘이는 언성을 높여가며 겁나게 싸웠습니다.
정말 남이 보면 치열하게 싸우는 것 처럼 고성과 육두문자가 오갔습니다.
급기야 멱살도 잡았습니다. 등을 보이며 앉아 일하고 있던 여직원이
더 이상 앉아 있는 것이 곤란하다고 느껴졌는지 황급히 자리를 피했습니다.
여직원이 나가자 그 친구는 내게 말했습니다.
“요번 건 좀 재밌었지?.....”
여직원은 그 친구가 갈 때까지 사무실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2
얼마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 친구는 통신의 세계에 듬뿍 빠져있던 중이었습니다. 마침 통신에 들어가 있을 때
전화가 왔습니다. 뭐 하느냐고 묻기에 통신중이라고 하니 녀석은 어느 통신사냐 묻더니
왜 전화를 했냐는 내 질문이 나오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습니다.
잠시 후 컴퓨터 화면엔 대화실로 초청한다는 메시지가 떴고 저는 바로 대화실로 갔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이 들어가 있던 한 대화실에서 그 녀석은 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얘기라도 하려는데 녀석은 내게 시비를 걸며
다짜고짜 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저도 맞장구를 쳤습니다.
차마 타이핑으로 하지 못할 망측한 문장들이 화면에 찍혀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순발력뿐 아니라 언어 구사력에 있어서도 최상급이라 자부하고 있던 우리 두 사람은
남들이 감히 생각도 못하는 기상천외하고
급진 파격적인 수퍼 메가톤급 욕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숫자란 숫자는 다 이용했고 신체 부위를 지칭하는 용어도 이미 다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덧 분위기가 삭막해진 대화실에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빠져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사람들이 다 나가자
내게 그전에 하던 말과는 전혀 다른 말투로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김유철(마징가H) 다 나갔냐?
김유철(마징가H) 재밌지?
김은태(bennet) 나야 언제나 재밌지. 너두 재밌냐?
김유철(마징가H) 욕이 좀 약한 것 같지 않아?
김은태(bennet) 그러게... 우리도 좀 더 연구개발 해야겠다.
그때였습니다.
갑자기 우리둘만이 있는줄 알았던 대화방에 난데없는 메시지 하나가 화면에 떠올랐습니다.
## 김진태(타이타이)님이 퇴장하였습니다. ##
아직 대화실 안에 사람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일로 나는 아직까지 그 통신사 대화실에 가지 못합니다.
3
김유철이란 친구가 하루는 사무실에 전화를 했습니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레코드샵을 운영하는 선배가 식구들 하고 놀러가며
자기에게 레코드샵을 맡겼다고 퇴근 길에 놀러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그곳은 제가 내리는 지하철 역사 안에 있는 곳이기에
어렵지 않게 퇴근후에 가벼운 마음으로 레코드샵에 들렀습니다.
레코드점 안에는 제법 많은 손님들이 저마다 음반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이 녀석이 그 사람 많은데서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축하합니다~ 빰빠라라빰~ 지금 오신 분은 우리 가게에 오신 100,000번째 손님입니다.
이분께는 동남아 3박4일 여행권을 드립니다. 여러분도 축하해주십시오~”
항상 그런 일을 만들곤 했지만 그때는 상당히 당황했습니다.
녀석은 커다랗게 생긴 그럴듯한 봉투까지 미리 준비해놓고 증정식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은 놀라는 표정과 한편으론 상당히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형식적인 박수를 쳤습니다.
바로 내 앞에 들어온 두 사람은 서로 끌어안고 안타까와 하기도 했습니다.
어떻게든 정신을 빨리 차리려고 노력하는데 녀석은 난데없는 인터뷰식 질문을 했습니다.
“근데 누구의 CD를 사러오셨지요?”
당황으로부터 잠시 안정을 찾은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습니다.
“공테푸 사러왔는데요?”
그 뒤로 그 녀석이나 나나 그 레코드샵은 피해서 다른 길로 돌아 갑니다.
4
나는 길눈이 무척이나 어두워 한번 간 길도 다시 가라면 못갈 정도여서
모르는 길을 간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입니다.
그런 내가 식구들을 데리고 홍천에 있는 콘도에 가야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김유철에게 가는 길을 묻기 위해 전화를 했습니다.
길에 대한 나의 능력(?)을 익히 알고 있는 그 친구는 ‘신청평대교’를 찾아 건너기만 하면
표지판이 많으니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 말하고
신청평대교까지 가는 길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너의 집에서 서대문까진 갈 줄 알지? 거기서 좌회전하면 광화문쪽이잖아?
그 길로 쭉 직진하면 신청평대교야!”
정말 간결하고도 명확한 안내였습니다.
비록 서대문에서 신청평대교까지는 2시간이 넘게 걸리지만 말입니다.
결국 나는 실수없이 홍천을 갈 수 있었습니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반가운 생각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친구인가 봅니다.
5
그리고는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아직 그 친구는 미혼입니다. 그전에는 여자보는 눈이 너무 높아서 그런줄 알았는데
지금보니 결혼이라는 것이 왠지 남의 일인 것 처럼 느껴지기 때문인가 봅니다.
오랜만에 그 친구를 반갑게 만났습니다.
그 친구는 하나도 변한 게 없습니다.
다만 내가 결혼했고 아이가 생겼을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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