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점심 식사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나른해지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갑자기 사무실 창밖에서 음향기기 소리가 요란하게 진동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무언가 잠이 깰만한 사건을 찾고 있었는데 제 발로 찾아오듯
그런 일이 생기니 기분이 무척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 소리는 너무도 커서 정상적으로 일을 하기에는 몹시 힘에 겨운 소리였습니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매우 정당한 명분이 생겼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주위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연구만 하는
만유인력의 대학자 뉴턴이 와도 욕을 하며 연구 자료를 내팽겨칠 만한 상황이었습니다.
뉴턴이 아니라 뉴턴 할아버지가 와도 일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얼른 옷을 추스리고 사무실을 나섰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오히려 '무슨 일인지 잘 알아보고 오라'며 고맙게도 일하기 싫은
나의 발칙한 행동을 정당화시켜주고 있었습니다. 일이 술술 잘 풀려가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길거리 어느 행사에
늘씬한 도우미들이 캔커피 같은 것을 나누어주고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짜증스럽고 나른한 오후에 늘씬한 도우미가 주는 캔커피를 마신다니
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너무나 행복에 겨워 발걸음도 가볍게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는 문제의 장소로
몸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2.
하지만 현장에 도착하니 기대밖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음식점 개업 행사였는데 기대했던 도우미나 캔커피는 전혀 보이지 않았고
양쪽으로 잔뜩 쌓아둔 스피커만 눈에 띄였습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속담이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주위를 가만히 살펴보니 당연히 있어야 할 늘씬한 도우미 대신
각설이 복장을 한 중년 아저씨만 눈에 띄었습니다. 나는 분노했습니다.
혹시나 예쁜 도우미라도 있을까봐 서둘러 사무실을 나온 사실이 쪽팔림으로 변해가면서
나의 분노는 더 심해졌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소음 공해를 유발하는 행사는 아직도 우리 사회가 후진국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전화기를 꺼내 국번없이 112에 신고했습니다.
경찰청에도 발신자 확인 서비스가 되는지 누구냐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신고를 마치고 요란한 굉음을 울리며 경찰차가 현장에 도착한 것은 정확히 3분 뒤였습니다.
대단한 기동력이었습니다. 우리나라 경찰이 그렇게 빠른지 몰랐습니다.
당연히 행사는 중단되었습니다.
예쁜 도우미가 없어서 기분이 나빴던 사실이
우리나라 경찰력의 기민한 출동 능력을 확인한 것으로 상쇄되는 것 같았습니다.
사무실에 돌아가 대단한 무용담이라도 되는 것처럼 경찰에 신고한 사실을
자랑삼아 떠들어댔습니다. 물론 예쁜 도우미가 없어서 신고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그저 한낮의 해프닝 정도로 끝이 날 것 같은 일이 또 다른 양상으로 번진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 뒤였습니다.
3.
한 시간이 지나자 창밖에서 또 다시 커다란 확성기 소리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전의 그 음식점에서 다시 개업행사를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대한민국 경찰 알기를 우습게 알아도 유분수지 이건 말도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곧 전화기를 다시 들어 또 신고를 해야 했으나
이번에는 혹시 예쁘고 늘씬한 도우미 언니들이 정말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아까와 같이 또 사무실을 나섰습니다. 하지만 현장에 도착하니
조금 전과 별반 차이 없는, 아니 조금도 다름이 없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진노했습니다.
두번이나 헛 걸음을 한 사실이 화가 났고 혹시라도 예쁜 도우미 때문에 내가
두번이나 이동한 것을 남들이 알게 될까봐 긴장하니 더 화가 났습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정의의 전화기를 다시 꺼내들고 또 신고를 했습니다.
이번에는 5분만에 왔습니다.
조금 전보다 2분 정도 늦었지만 오후가 깊어갈수록 심화되는 교통체증의 특성으로 볼 때
충분히 이해가 되는 부분이라 그에 항의하지는 않았습니다.
또 조용해졌습니다.
이번에는 그나마 경찰이 하지 말라면 일단 하지 않는 우리나라 서민들의
준법정신을 확인한 것만으로 억지로 좋은 기분을 유지하며 사무실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또 한번 대단한 무용담인양 잔뜩 떠든 다음 이로 인해 소모된 시간을 되새기며
몹시 흡족해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무실 직원들이 이상한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에이~ 조용하니까 오히려 이상해...."
세상에 이런 발칙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아까는 분명 시끄러워서 112에 신고한 내게 잘 했다는 얘기를 서너번씩 반복하던 사람들이
두번이나 신고해서 겨우 조용해지니 심심하다니요.
내가 몹시 흥분하려던 그 순간 갑자기 동료직원은 뜬금 없는 제안을 했습니다.
4.
"있잖아, 우리 그러지 말고......."
이 사악한 동료직원의 제안은 개업 행사를 하던 그 식당에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거냐 반문하니 그냥 가보자고만 했습니다.
신고는 내가 했지만 자신도 암묵적인 동조 또는 범인 은닉 및 불고지죄에 해당된다는
생각을 했는지 범인으로서 가져야 할 필수 덕목인
'범인은 반드시 현장을 다시 찾는다' 라는 속설을 입증하고 싶은 것 같았습니다.
이유야 어쨌든 그 식당에 가본다는 것도 매우 재미있는 일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설마 신고한 사람이 나라는 사실을 알 리가 없으니
그것도 재미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동료직원 2명과 함께 손님을 가장하여 뻔뻔하고도 씩씩하게
그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그냥 구경만 할 수는 없어서 먹기도 싫은 음식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주인에게 관심이 있는 척 말을 건넸습니다.
"이 집 오늘 개업인가 보죠?"
"예.... 많이들 이용해 주십시오"
사장인듯한 사람이 연신 굽신거리며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나름대로 불만이 있었습니다. 원래 개업이라면 떡을 주던가 아니면
업소 이름이 커다랗게 인쇄된 라이터라도 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개업이라고 말만 하면서 아무 것도 가져오는 게 없었습니다.
나는 대노했습니다. 마침 옆으로 지나가던 주인에게 슬며시 물었습니다.
"오늘 개업식인데 뭐 준비하신 것 없나요?"
"아...그게요.... 준비는 했는데 주민들이 자꾸 경찰에 신고해서...."
내가 물은 것은 공짜로 나누어주는 라이터나 떡의 유무에 대한 질문이었는데
주인은 가증스럽게도 그 재미도 없는 이벤트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또 흥분했습니다.
그리고 이내 흥분을 가라앉히고 이성을 찾은 얼굴로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그게 말입니다....."
내말인즉, 신고를 했다고 멈추면 안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벤트 회사에 일당을 주고 의뢰한 행사니 다시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경찰이 그런거 가지고 화만 내지 설마 벌금을 내게 하겠냐고 주인의 의욕을 붇돋았습니다.
그리고 퇴근 시간도 다 되어가니 또 신고할 미친 놈은 없을거라는
강경한 어휘를 구사하며 주인을 안심시켰습니다.
주인은 곧 진지한 표정을 하더니 정말 그래도 되겠냐며 내게 물었습니다.
이럴 때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한 나는 단호한 표정과 말투로 '당근'이라고
말했습니다. 주인아저씨는 주먹을 불끈 쥐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잠시후에 우리 자리로 당근 몇 조각이 나왔지만 못본 척하고 황급히 자리를 떴습니다.
우리 일행이 사무실에 돌아오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스피커 소리가 또 다시 진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들어도 정말 큰 소리인 것만은
분명했습니다. 나는 또 다시 정의의 전화를 들었습니다.
핸드폰으로 하면 경찰도 지겨워할까봐 사무실 전화로 했습니다.
그리고 여지없이 우리의 경찰은 5분만에 나타나 거리를 조용히 잠재웠습니다.
다시 생각해도 대단한 기동력에 혀를 내두르고 있었습니다.
5.
가끔 본능적인 일에 의욕을 내세울 때 우리는 그것을 가르켜 속물근성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정말 속물근성은 그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이익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판단으로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손해와 이익으로 생기는 가치관의 변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절제할 줄도 알고 또한 냉정할 줄도 아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세상은 분명 아름다와 질 것이라는, 내게 어울리지 않는 근엄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식당을 잘 운영해보려고 개업행사를 한 식당 사장님께
심심한 유감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민중의 지팡이로 이 나라의 질서와 안녕의 유지를 위해 동분서주하시는 경찰관님.
바쁘신 와중에 왔다 갔다하게 만들어 죄송합니다.
그리고 이 재미도 없는 긴 글 읽어주신 분께도 송구스럽습니다.
나는 나쁜 놈입니다.
'짧은 글 긴 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 변태의 이유있는 항변 (0) | 2024.07.05 |
---|---|
내 친구 김유철 (0) | 2024.07.05 |
프리셀 (0) | 2024.07.05 |
사악한 사람들 (0) | 2024.07.05 |
어느 동호회 모임에 가던 날 (0) | 2024.07.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