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글 긴 얘기

어느 동호회 모임에 가던 날

아하누가 2024. 7. 5. 01:14



1

토요일 오후였습니다.
그날 저녁은 내가 속해 있던 모 통신사 동호회의 정기모임이 있던 날이었습니다.
모임 시간은 6시였고 약 30여분 남짓 여유가 있어 모임 장소까지 걸어가기로 했습니다.
주변의 동료의 말에 의하면 걸어가면 멀 것 같지만
막상 걸어보면 1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라는 말이
일단 좋은 명분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전철비라도 아껴보자는 의도에서 진작부터 걷기로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2

부지런히 걷고 있자니 땀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땀이 나면 갈증도 납니다.
갈증이 나면 뭔가 수분을 섭취해야 합니다. 하지만 길 한복판 어디서 물을 먹습니까?
그래서 구멍가게에서 청량음료를 하나 사 먹었습니다.
조그만 구멍가게였는데 청량음료 하나에 800원 달라더군요.
마신 것이 다 눈물로 나올 것 같은 엄청난 후회가 들었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지하철요금 550원은 아낀 셈이고 더욱이 그 동호회는
6시 이전에 온 회원에게는 1,000원을 할인해주고 있었기에
아직까지는 남는 장사라 생각하면서 애써 쓰린 속을 참고 있었습니다.

 

 

 

3

그리고 또 걷기 시작했습니다.
명동 근처를 지나갈 무렵 무언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을
발견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니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 ‘북한어린이 돕기’행사였습니다.
전시된 사진만 보아도 눈물이 날 지경인데 비디오까지 틀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만 해도 충격적인 장면이었는데 옆에 다가와서 설명하는 아가씨가
너무 이쁜 것이었습니다. 이럴 때 아무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라는대로 해야 합니다.
그나마 다행히도 후원회 가입용지에는 감히 싸인을 못하고
3,000원을 성금조로 바구니에 넣었습니다.
아끼려고 했던 회비 1,000원과 지하철요금 550원, 그리고 성금 3,000원의 이해 관계와
본전 관계를 심적부담상 이로운 쪽으로 정립하려고
머릿속에서는 알고 있는 모든 경제학적 논리가 동원되고 있었습니다.

 

 

 

4

그러다 보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러다가는 회비를 1,000원 더 내야 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서둘러 지하도를 건너려는데 이번에는 어느 할머니가 잡다한 물건들을 펼쳐놓고
판매하고 계셨습니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정말 화나는 일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부모님을 이렇게 길거리로 내모는지
울화통이 터져 버릴 것 같았습니다.
차근차근 할머니 말씀을 듣다가 애가 있냐고 물으시길래 하나 있다니까
할머니는 내게 선풍기에 씌우면 애기들 손가락 들어가지 않는다는 선풍기 안전망을
두개 주셨습니다.

말이 주신거지 사실은 내가 산거지요. 우리집에는 선풍기가 없습니다.
있긴 있는데 안돌아 가니 없는 거나 같습니다.
그리 덥지도 않은 집이며 집안 경제 사정상 더워도 그냥 참아야 합니다.

 

 

 

5

모임장소에 도착하니 막 6시를 알리는 시보가 울렸습니다.
다행히 지각은 아니어서 처음 목표했던 회비 1,000원은 아낄 수 있었습니다… 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모임의 대표가 나서더니 이번 정기모임에는
그 내용의 공지를 게재하지 못했다며 일단 사과를 하길래 잠시 불안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일괄적으로 11,000원씩 걷더군요. 10,000원씩도 아니고 11,000원씩.
흥분을 참지 못하고 따지려고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는데
주변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지갑을 꺼내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기가 죽어 있는 나를 주변에서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 보았습니다.
머쓱해진 나는 노래나 한 마디 하려고 일어났다고 둘러댔습니다만
그것도 사람들이 말리는 바람에 정말로 이상한 놈만 되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북한 어린이와 청량음료, 그리고 필요도 없는 선풍기 안전망이 생각났습니다.

 

 

 

6

어쩌면 내가 걸어온 그길은 사회 여러가지 모습들을 떠오르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느낀 문제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800원짜리 포카리스웨트 -
공정거래법에 위반되는 이런 일들이 우리 사회에는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2. 북한어린이 -
비단 어린이 뿐만 아니라 북한의 기아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됨과 동시에
통일에 대한 문제가 새삼 숙연하게 느껴짐.

 

3. 이쁜 여자 -
이쁜 여자가 홍보하면 효과가 높아진다는 사실로 우리 현실이
너무 외모 중심으로 되어간다는 심각한 사실을 몸소 증명.

 

4. 좌판 할머니 -
노인복지와 관련된 법규는 물론 효도라는 덕목의 도덕적 문제도 새삼 중요성 인식.

 

5. 선풍기 안전망 -
어린이를 안전하게 보호해야 하는 개념 재확인.

 

6. 잘못된 공지 -
공지사항을 쓰는 [공직자]는 말과 행동에 책임의식을 가지고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사실 새삼 확인.

 

 

 

가끔은 지하철을 타지 않고 길을 걸어보는 것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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