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글 긴 얘기

여행속의 작은 이야기

아하누가 2024. 7. 5. 01:13



1

지난 1997년 9월에 있었던 월드컵 최종예선
일본과의 도쿄 경기 현장에 붉은 악마와 함께 있었습니다. 당시에 있었던 사건 한가지…….

선발대로 다른 사람보다 하루 먼저 동경에 도착하여 미리 일정을 점검하고
울트라 니뽄이라고 칭하는 일본 친구들도 만나며 바쁜 일정의 하루를 보내고
본팀이 들어오는 날을 맞게 되었습니다.

우리 일행이 묵을 장소는 여관도 아니고 그렇다고 호텔도 아닌 아담한 숙소로 다른 것은
그리 아쉬운 것이 없었는데 경비를 아끼다 보니 목욕실은 각방마다 있었던 것이 아니고
공동으로 사용하는 곳이었습니다.
평소에 그리 목욕과 친한 사람은 절대 아니었지만 그래도 뭔가 부족한 부분이 나오니
이에 대한 강한 욕구가 점점 더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본팀이 도착하는 오후부터는 욕실 사용이 순탄하지 않을 것이라는
잔머리를 굴리며 본팀이 도착하기 전에 미리 목욕을 하기로 작정하고
집에서 챙겨온 수건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습니다.
늘 하던대로 대충 몸에다 물을 뿌리는 시늉만 하다가 이내 포기하고 욕실을 나서려는데
욕실 입구에 잔뜩 쌓여 있는 수건 더미를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수건은 집에서 하나만 챙겨와서 이것이 젖으면

상당히 불편할 것이라 고민하고 있던 터였습니다.
욕탕 입구에 있던 수건들은 그 모양이 흔히 호텔에서 보았던
흰색을 띤 일정한 모양의 수건이 아니고 제각각인 모양을 하고 있어서
좀 의아해 하긴 했지만 상태가 제법 깨끗해 보여
그냥 그것으로 몸을 닦고는 즐겁게 욕실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방에 들어가보니 없는 줄 알았던 그 커다란 흰색 수건이 자그마치 4개나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갑자기 조금 전 욕실에서의 상황이 머리를 스쳐 갔습니다.

 

‘그렇다면 아까의 그 수건은?’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냥 모른 척 하고 가만히나 있을 걸 황급히 계단을 뛰어 내려가
관리하는 아저씨에게 물어 보았다가
그 수건은 목욕하고 나오면서 발을 닦으라는 용도로 그곳에 쌓아 두었던 걸레라는
충격적인 소리만 들어야 했습니다.

충격도 충격이었지만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새로운 사실 하나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목욕을 하는 것이 반드시 상쾌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2

그렇지만 이미 한번 한 목욕을 단지 걸레를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
다시 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웬만큼 지저분한 것은 인내로 견디는 것을 늘 미덕으로 생각해왔던 내가
그까짓 일에 흥분할 수는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잠시였고 시간이 흐를수록 불쾌한 기분은 계속 심해지고 있었습니다.
과연 자존심을 버리고 상쾌함을 되찾을 것인가?
아니면 늘 그랬던 것처럼 정신력으로 버틸 것인가?
이 고민을 무려 6시간이나 하는 바람에 이미 본팀은 숙소로 행진을 하며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합류한 일행들은 나의 이런 복잡한 속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반갑다며 나를 얼싸안고 호들갑을 떨고 있었습니다.

하마터면 사실대로 고백할 뻔 했습니다.

 

 

다음 날은 일본과 운명이 한판이 벌어지는 날입니다.
모두들 숙소에 차분히 앉아서 내일 응원에 쓰일 여러가지 준비물들을 챙기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숙연한 광경이었습니다.
그러한 숙연한 장면을 보면서 난 내가 할 수 있는 어떤 일이라도 승리에 도움이 된다면
반드시 하고야 말겠다는 결의에 찬 각오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말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내일의 승리에 일조를 할 것이라는,
태어나서 가장 굳은 각오를 되새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각오는 각오일 뿐이고 오전에 목욕탕에서 생긴 그 사건으로 인한 불쾌감은
점점 심해지기 시작했으며 또한 자제력도 점점 잃어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TV옆에 가지런히 놓여진 흰색의 커다란 수건을 한참이나 쳐다보다
결국 다시 목욕탕으로 가기로 맘을 먹었습니다.
수건을 들고 방문을 나서면서 난 생각했습니다.
쓸데없는 자존심이나 인내력은 인생에 있어 전혀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3

욕실로 향하는 길에 문이 열린, 얘기 소리가 커다랗게 들리는
어느 방앞을 지나칠 때였습니다.
모두들 나와 비슷한 각오들을 다지는 모습이었으며 그와 관련된 얘기들이
오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무심코 지나치려던 내게
너무도 충격적이고 끔찍한 소리가 내 귀에 생생히 들려왔습니다.
어떤 사람이 결의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던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운동 선수들은 경기전날 손톱 발톱을 깍지 않는 것은 물론
면도나 이발도 않하는 것이 승리를 위한 징크스야.
나도 내일의 승리를 위해 이것은 물론 세수까지도 하지 않을꺼야!”

 

그 소리를 듣고 들고 있던 흰색의 그 커다란 수건을 벗삼아
발길을 다시 내 방으로 돌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생각했습니다.
역시 인내력 같은 자존심은 인생에 있어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경기에서 우리는 일본에게 통쾌한 역전승을 거두었습니다.
어처구니없게도 난 아직도 내가 자존심을 지킨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여행에서의 청결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가끔은 자존심이 더 중요할 때도 있습니다.

 

 

 

'짧은 글 긴 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악한 사람들  (0) 2024.07.05
어느 동호회 모임에 가던 날  (0) 2024.07.05
개성에 대한 작은 감상  (0) 2024.07.05
술값, 그 영원한 숙제  (0) 2024.07.05
사무실 화장실에 얽힌 말못할 이야기  (1) 2024.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