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끔씩 술값을 안내 보려고 갖은 잔머리를 썼던 기억은
누구에게나 한번 정도는 있었을 겁니다. 그 잔머리는 이상하게도 성공하면 왠지 찝찝하고
실패하게 되거나 또는 남들이 눈치를 채게 되면 더 민망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경제적인 사정으로 매일 나서서 술값을 낼 수도 없는 일이니
이 또한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술값을 내지 않으려고 노력할 때만 스트레스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2
같은 동호회 회원이 퇴근 무렵 사무실에 놀러왔습니다.
거래처에 업무를 마치고 퇴근하는 길에 들렀다고 합니다. 별 약속도 없고
또 귀하게 찾아온 사람이니 저녁식사를 대접하려 했습니다.
조금 부담스러워 하긴 했지만 그래도 저녁도 안 먹고 가면
내가 더 곤란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는지 이에 응하게 되었습니다.
저녁 식사하러 식당으로 향하는 길에 잠깐 잊었던 사실 한가지가 생각났습니다.
현재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확인을 안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사람과 계속 대화는 대화대로 나누면서 주머니 속에 돈이 얼마 있는지를
재빠르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돈이 1만 5천원이라는 사실도 기억나게 되었습니다.
가지고 있는 현금으로는 밥 먹고 술 한잔하기에 약간은 모자란 돈이라는 사실이 생각나
신용카드를 쓸 심산으로 일부러 조금 번듯해 보이는 음식점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갈비 2인분이랑 밥, 그리고 맥주 2병을 시켰습니다.
얼핏 총액을 계산해 보니 신용카드로 계산하기에는 약간 적어 보이는 액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왕 신용카드로 계산하는 거 적당한 액수가 나와야 합니다.
한 1만 8천원 정도 나오면 신용카드 내밀기도 쑥스럽습니다.
그래서 갈비를 조금 추가하고 맥주를 한병 더 시켰습니다.
하지만 마주 앉아 있던 손님은 더 먹을 것도 아니면서 뭐하러 시키냐며
돌려보내려고 하지 않겠어요?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더 먹고 싶다고 그랬지요. 그 사람은 내가 술을 먹지 않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상하게 쳐다보길래 요즘 변비에 걸려 고생하는데
변비에는 맥주가 좋다고 얼버무렸습니다.
지저분한듯한 병명을 말하긴 싫었지만 상황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위장병이나 간암경화에 맥주가 좋다고는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오히려 그 기민한 순발력에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억지로 많이 먹었습니다.
맥주도 일단 병뚜껑만 개봉하면 돈을 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지라
일찍 개봉해 버렸습니다. 돈 아끼려고 노력한 적은 많아도
돈 쓸려고 이렇게 눈물나는 노력을 해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3
식사를 다 마치고 계산하기 위해 카운터로 다가 갔습니다.
마치 각본이라도 짠 것처럼 서로 내겠다는 실랑이가 약간 오갔지만
기세가 등등한 나의 태도에 상대방은 잠시 뒷전으로 물러났습니다.
그리고는 멋지게 물었습니다.
“아저씨, 여기 다 얼마요?”
그러자 주인으로 보이는 한 아저씨가 커다란 눈을 꿈벅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1만 6천원인데요...”
“.....?”
여기서부터 몹시 심한 갈등과 많은 잔머리가 집요하게 오가는 상황이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얼핏 눈대중으로 보아도 그 주인은 계산을 잘못한 것이 분명했습니다.
적어도 2만8천원 가량은 나와야 하는데 만육천원 이라니요.
아마도 나중에 추가로 주문한 것들이 누락되었거나 또는 다른 테이블 가격으로
잘못 계산되었음이 분명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거기서 사실대로 진상을 밝혀줄만한 인간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인간성이 나쁘다기보다는 아마 주인 아저씨의 계산이
정확했으리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으려고 억지로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식당 주인은 음식값을 계산한 횟수가 내가 구구단을 사회생활에 적용한 횟수보다
많을 지 모릅니다. 그런 음식값 계산의 전문가 앞에서 아마추어가
감히 음식값이 틀렸다고 나설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전문가 계산이 맞을 거라고, 강제적으로라도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또 있었습니다.
가지고 있는 돈은 만오천원 뿐이어서 결국 신용카드를 내밀어야 했습니다.
신용카드로 계산하기에는 조금 쑥스런 액수인데다 신용카드로 계산하는 동안
누락된 부분들이 다시 기억이 날까봐 걱정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같이온 손님에게 천원짜리 한장만 빌려달라는 것은
모처럼 하는 접대에 커다란 오점을 남기게 되는 일이 뻔한 일 아닙니까?
이런 경우는 천원 짜리 한장 달랑 들고 만오천원 보태달라는 경우와 다를 게 없습니다.
어차피 한턱 내는거 단 일푼이라도 도움을 받으면
돈지불의 순수성이 훼손된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별 다른 일 없이 계산을 마쳤습니다.
음식점을 나오자 마자 급한 마음에 조금 빨리 걸었더니 같이 온 손님이
뭐 죄 지은 거 있냐고 물었을 때 가슴이 조금 뜨끔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 주인 아저씨의 계산을 믿기로 했습니다.
뭐가 어떻게 되었든 무조건 믿어야 합니다.
4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것도 예전 일입니다. 요즘은 어찌된 일인지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각자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는 일이 흔해졌습니다.
난 오래전부터 그것이 우리 정서에 별로 어울리지 않는 방식이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서구의 합리적인 방식이 어느덧 우리네 입맛에도 맞아졌나 봅니다.
누군가 술값 한번 내고 또 누군가 내고 그래도 못낸 사람은 또 다른 자리에서 내고…
이렇게 사회적으로 커다란 굴레 속에서 순서가 돌아가는 것이
한국적인 ‘더치페이’ 방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혼자만의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왠지 그 방식은 호감이 가지 않습니다.
서로 내겠다고 다투거나 또는 어떻게 안 내려고 숨어있는 것도 지나고 나면
다 좋은 추억인데 말입니다.
앞으로는 그냥 혼자만이라도 좋다고 생각하는 이 방식을 지켜야겠습니다.
쉽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혹시 누군가 충무로 근처에 왔다가 갈 곳 없이 거리에서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 있다면
연락주세요. 술은 잘 못하지만 내가 한잔 사드리지요.
갚는 것은 다른 분에게 갚아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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