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글 긴 얘기

사무실 화장실에 얽힌 말못할 이야기

아하누가 2024. 7. 1. 00:55



1

내가 일하는 사무실에는 한 층에 두 개의 화장실이 있습니다.
사무실 바로 옆에 화장실이 있는데 아쉽게도 숙녀용이고
꽤 멀리 떨어진 엘리베이터 옆에 있는 화장실이 신사용입니다.
물론 바로 옆의 비상 계단으로 한 층 내려가거나

또는 올라가도 남자화장실이 나오지만
인내력과 게으름의 일인자인 나는

주로 엘리베이터 탈 일이 생길 때까지 참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직원이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 사무실 직원들은 모두 다리를 꼰 자세로 일합니다.

 

 

하루는 아래 층에 내려갈 일도 있어 엘리베이터 옆의 남자화장실로 가는데
화장실 입구에서 누군가가 화장실 안쪽을 향해 이렇게 외치고 있었습니다.

 

 

“안에 성기있냐?”

 

 

참으로 별 사람 다봤습니다.
화장실 앞에서 신체 일부를 직접 거명하며

큰소리로 부르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속으로 ‘그럼, 안에 쌓이고 쌓인게 그건데...’라고 생각하며

화장실에 들어서려는 순간,
누군가 안면이 있는 사람이 말도 안되는 듯한 그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
화장실에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영화배우 안성기씨였습니다.
깜짝 놀라는 바람에 억울하게도 악수도 하지 못하고 싸인도 받지 못했습니다.
내가 일하는 사무실은 영화배우협회와 같은 층에 있습니다.

 

 

 

2

그래서 대부분 퇴근한 밤 늦은 시간이면

옆에 있는 여자화장실을 살짝 이용합니다.
정말 가까와서 편리합니다.

 

그날 밤도 대부분 4층 사람들이 퇴근했길래 여자 화장실에 갔습니다.
아시다시피 여자화장실엔 남자용 소변기가 없고 문 달린 ‘실’만 있습니다.
한칸에 들어가서 볼 일을 보는데 누군가 들어오는 인기척이 났습니다.

긴장했습니다.
잘못하면 변태됩니다.

숨을 죽이며 화장실 안에서 그 사람이 볼 일을 끝내고

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옆 칸에 들어간 그 사람의 ‘볼 일 소리’를 들어보니
물줄기가 떨어지는 시발점이 상당히 높은 지점으로 보아
이건 각도상으로나 시차상으로나 여자가 아닌 남자임이 분명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신체적 차이를 현실에 응용할 줄 아는 능력에

스스로 감동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우리 사무실 직원인 것 같았습니다.

갑자기 긴장이 풀린 나는 자연스럽게 화장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여유있게 손을 씻으며 시간을 최대한으로 끌고 있었습니다.
왜냐 하면 안에 있는 그 사람도 나를 여자로 생각하고 거기서 긴장한 채
내가 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거지요.

하지만 예상밖으로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여자였습니다.
나도 놀랐지만 그 여자는 마치 공포영화의 여주인공처럼 놀라며 차마
아무 소리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짧은 순간에 정신을 차린 나는 놀람을 지나쳐 잔뜩 긴장한 얼굴로 서있는
그 여자에게 마치 TV에 나오는 폭력배와 같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당신 나 알아?....앙!!!!????”
“모....모....모르겠는데요.......”

 

 

그 대답을 듣고 모르는 사람임을 확인한 나는 바로 도망갔습니다.

정신없이 도망갔습니다.
그 여자가 소리라도 지르면 난 완전히 변태됩니다.
변태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여자 화장실에서 잡히는 변태가 가장 추접스럽고 질낮은 변태가 됩니다.

여자 목욕탕에서 잡히면 우스개 거리나 되고 주변에서 궁금함을 묻는
얼빠진 친구라도 나타나지만 화장실은 아주 지저분한 놈만 됩니다.
그래서 그날 이후 아직까지 나는 우리 건물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못합니다.

 

 

 

3

우리 사무실에는 화장지를 사지 않습니다.
필요할 때면 밤마다 여자 화장실에 가서

변기 옆에 매달려 있는 화장지를 훔쳐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장면 시켜 먹고 난 다음에도 그 화장지로 입 닦지 않습니다.
사무실에 온 손님들만 닦지요.
우리들은 길거리에서 나눠주는 <박찬호>라든가

<장안의 미희 200명 항시 대기>라고 쓰여있는 홍보용 휴대티슈를 씁니다.
아직도 우리 사무실을 찾는 손님들은 그 비밀을 모릅니다.

 

 

 

4

얼마전 여자 화장실의 몰래카메라라는 것들이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정말 이제는 별 쓸 데 없는 것까지 일본에서 수입하는 모양입니다.
쓸 데 없는 것 좀 따라하지 맙시다.

여자 화장실에 많이 가본 내가 확신합니다. 재미있을 거 하나도 없습니다.

아마도 남에게 보여지는 인격도 중요하지만
자신에게 보여지는 인격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한번씩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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