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글 긴 얘기

사악한 사람들

아하누가 2024. 7. 5. 01:15



1

얼마전에 가족 방문차 미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LA 근교에 사는 선배의 집에 들렀습니다.
미국으로 이민온지 4년째를 맞고 있던 선배는 페인트칠을 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내가 한국에서 왔으니 반가왔겠지만 그렇다고 하던 일을 쉬어 가면서
나랑 놀아줄 수는 없었습니다.
나도 당연히 일이 있으면 선배가 일을 마치는 시간까지 집에서 낮잠을 자던가
그집 아들이랑 놀던가 하며 선배의 생업에 지장을 주지 않으려고 마음 먹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선배는 내가 머무는 며칠간 일이 없었고
그래서 즐겁게 여기저기 나를 데리고 다닐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3일이 지나니 왠지 선배가 일이 없다는 사실이 조금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오히려 일에 바쁜 모습이 내 입장에서는 더 안심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3일째 되던 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잠시 TV를 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전화가 왔습니다.
선배의 통화 내용을 가만히 들어 보니 내일 갑작스럽게 일이 생긴 모양이었습니다.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선배 부부는 무언가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얘기를 가만히 들어보니 그 선배는 일하러 갈 때 인부 2명을 데리고 가는데
주로 임금이 싼 멕시칸들을 데리고 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에 대한 연락을 너무 급작스레 받은지라 같이 일을 하러 갈 사람을
구하지 못해 그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누굴 데려 가지?”

 

혼잣말처럼 말한 선배의 말이 여운을 채 남기도 전에 선배 부부는 무슨 생각들을 했는지
갑자기 눈이 마주쳤고 가만히 TV를 보고 있던 나를 향해
약속이나 한듯 고개를 스르르 돌리고 있었습니다.
아, 그 눈빛. 나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사악한 눈빛이었습니다.
그리고 생각을 해보니 정말 사악한 사람들이 주변에 많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사무실에서 별것 아닌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주제는 요즘 어린 아이들이 지나친 과잉 보호 속에서 자라고 있다는 내용으로,
양편으로 나뉘어 의견이 대립되는 토론이 아니라
자신이 자라던 일들을 마치 무용담처럼 역설하며 한가지 주제로 흐르는
일방적 성토에 가까운 대화였습니다. 흥분한 한 사람이 열변을 토했습니다.

 

“요즘은 엄마들이 더 문제라구. 과자 같은 거 땅에 떨어뜨리면 그냥 버리잖아?
이게 말이 돼? 우리 어렸을 때 그랬나?
지나가던 지렁이도 주워먹고...뭐 그렇게들 자라지 않았어?”

 

이 사람은 당연히 모두들 자신의 열변에 동조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분위기도 그랬었고 지금까지 해온 대화의 내용도 그러했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지렁이었습니다.
듣던 사람중 한 사람이 그 사람의 열변이 마무리되고 이어 맞장구를 쳐야 하는 타이밍인
그때 그만 이렇게 말한 것이었습니다.

 

“에이... 아무리 그렇다고 지렁이를 주워 먹지는 않았지...”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하게 변했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얘기하던 요즘 애들의 과잉 보호에 대한 주제는
이미 잊어버렸는지 계속 지렁이 얘기만 했습니다. 정말 사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더욱이 지렁이 얘기를 꺼낸 그 사람은 건망증이 심해
작은 소지품을 자주 잊어버리곤 하던 사람이어서 그 이후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어린 시절 지렁이를 먹었기 때문이라는 인신 공격성 발언도 서슴지 않고 하게 되었습니다.
순간적인 맞장구를 외면한 것은 물론 작은 말꼬리를 잡아
향후 몇년간 그 이야기를 우려먹는 매우 사악한 집단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사무실 직원이고 물론 나도 그 중에 한 명입니다.

 

 

 

3

친구가 결혼을 하게 되었다며 결혼할 여자와 함께 사무실에 찾아왔습니다.
사무실 앞 커피숍에 앉아 인사를 나누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도 사자에 대한 얘기가 나왔습니다. (내 주변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들만 있는지 대화의 주제도 참 다양합니다.)
그러다가 ‘사자는 고양이과’라는 생물학적 지식에 근거한 얘기까지 오가게 되었습니다.
그 말이 나오자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어 얘기를 꺼냈습니다.

 

“사자가 고양이과 맞아?”

 

그러자 친구는 당연히 고양이과라며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며
내 생물학적 지식 수준를 유린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지적 열등감에 사로 잡혀 사자는 고양이과가 아닐꺼라고 큰소리를 치게 되었습니다.
친구는 여전히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그럼 내기를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내기라는 단어에 다시 한번 신중히 생각을 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친구와 결혼을 하게 될 여자가 대뜸 그러는 게 아니겠어요.

 

“호랑이는 맞는데 사자는 고양이과가 아니지 않아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내기라는 단어 앞에 냉정해지던 신중함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오로지 흥분과 충동만이 남아 친구와 내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번세번 내기의 내용과 이행 여부, 불이행시의 제재 조치 등
기본적인 내기의 규정을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마지막 확인을 하고 다짐을 하는 순간 갑자기 친구의 약혼자가 말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사자는 고양이과가 맞는 것 같아....”

 

갑자기 친구 옆에 있는 여자가 고양이로 보였습니다.
에드가 앨런포우의 글에 나오는 음침한 고양이부터 시작해서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고양이,
그리고 어린 시절 만화에서 본 기분 나쁜 고양이의 모습은 모두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친구는 이 상황을 ‘부창부수’라던가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문구를 삽입시켜
흐뭇하게 해석했겠지만 내가 보는 이 상황은 매우 사악하기 그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악한 사람들...

 

 

 

4

새천년을 앞둔 연말의 어느 늦은 밤, 택시를 타고 집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택시기사는 보기 드문 여자 운전기사로 대학생 자녀를 두었음직한 아주머니였습니다.
그 여자 기사는 세종로를 지날 즈음
새천년 맞이 행사에 지나치게 많은 돈을 뿌렸다는 얘기를 꺼내며
몹시 흥분하고 있었습니다.

얘기의 진행으로 보나 기사와 승객간의 짧은 인연으로보나
당연히 이에 맞장구를 쳐야 함에도 나는 아주머니 기사의 말에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시민들에게 쓰는 돈은 그리 아깝지 않다고 말이죠. 아마 맞장구를 예상했던
아주머니 기사는 그런 내가 몹시 사악한 사람으로 느껴졌을 겁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니 그 동안 사악하게 느꼈던 몇 가지의 경우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민들 보여주려고, 시민들 재미있게 해주려는 행사에 돈이 들어가는 것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오히려 사회의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는 지도층 인사들의 이기적인 행동이
훨씬 더 사악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새천년 맞이 행사에 100억원 가량이 소요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 보다 더 많은 액수를 손해본 일들이 생각났습니다.
율곡비리, 고속철도 선정, 러시아에 빌려준 돈, 그리고 더 큰 단위로 기억되는 비자금…
정말 이땅의 사악한 사람들은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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