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칼럼

시내버스 디자인에 대한 단상

아하누가 2024. 1. 17. 20:34

 

 

 

 

2004년에는 눈에 띄는 변화 한가지가 생겼다. 바로 시내버스다.
외관상으로 눈에 띄게 달라졌고

요금체계나 노선도 확 달라졌다. 거의 혁명적 변화다.
그러나 급격한 변화에 따르는 문제점도 항상 따라오기 마련이어서
이 시내버스 개선 문제는 수차례 언론과 시민들의 질타를 받았다.
전용차선의 부적합과 요금인상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들은 다분히 행정적인 문제이므로
그 분야에 대해 별로 아는 것 없는 내가 딱히 문제점을 꼬집을 만한 능력은 없다.
다만 새로운 시내버스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름 아닌 시내버스의 디자인 문제다.

 

 

예쁘게만 보이는 버스 디자인에는 매우 커다란 문제가 있다.
얼핏 보기에도 금방 드러나는 문제가 있다.
우선 3가지 색상이 섞여 원색을 벗어난 빨강과 파랑은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런 색상의 계열과 궤를 함께 하지 못하는 형광 녹색이 문제다.
왜 그 한가지 색상만 빨강과 파랑에서 쓰였던 방식과 다른 형광을 채택했을까.
그것도 모자라 사람들이 무슨 색인지 모를까봐

R,G,B라는 친절한 표기까지 커다랗게 했을까.

 

그러나 사실 이러한 문제도 큰 문제점은 아니다.
그냥 보이는대로 빨강은 빨강으로,
파랑은 파랑이며 녹색은 녹색이라 생각하면 의외로 간단해진다.

 

 

현재 시내버스의 디자인은 유럽풍을 벤치마킹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계열의 색상이라도 그 농도(톤, TONE)를 조절하여

은근한 멋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행선지 표시 부분을 과감하게 단축하여 핵심 행선지만 표기하게 함으로써
단순미와 더불어 넉넉한 여백의 미를 강조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넉넉한 여백의 미가 문제다.
디자인을 하면서 괴로운 일은 의뢰인의 취향에 맞추는 일이다.
그 보다 더 어려운 일은 의뢰인을 설득하는 일이다.
의뢰인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사람은
단순하고 깨끗한 것이 가장 좋은 디자인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진 사람들이다.
군더더기가 많은 디자인을 요구하는 의뢰인에게
심플한 특징을 강조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깔끔함이 최선으로 인식하고 있는 의뢰인에게
몇가지 장식을 덧붙이는 일을 설득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깔끔한 디자인,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심플하고 깨끗한 디자인은

정말 어려운 것이다.
단지 심플하고 세련되기만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 기능까지 충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디자인이 원하는 목적을 우선 갖춰야 하고
그 목적에 충실하게 디자인하는 것이 우선이지
무조건 보기에 좋으라고, 보기에 깔끔하라고 만들어지는 디자인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금 시내버스가 그꼴이다.
행선지 표시를 과감하게 생략하고 그 크기도 줄여 넉넉한 공간을 확보했다.
그리고 그 공간들은 모두 여백으로 남겨 둠으로써 매우 세련된 모습이 되었다.
그러나 버스는 사람이 목적지로 이동하게 위해 타야하는 교통수단이다.
세련된 것도 좋지만 우선 목적지에 대한 표식부터 선명하게 했어야 한다.
오로지 번호만 봐고 타야 하는 시내버스는
그동안 버스 옆면에 주렁주렁 쓰여진 주요 행선지에 익숙한 승객들을

당황하게 했다.

 

결국 우려했던 일이 터졌다.

새로운 시내버스가 모습을 보인지 한달도 되지 않은 때
각 버스회사마다 자체 제작한 예전 행선지 표지판이

버스 옆구리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부터 애초 계획했던 디자인은 여지없이 망가지기 시작한다.
넉넉한 여백의 미를 디자인의 포인트로 만들어진 그 공간이

 예상치 못하게 채워지자
버스의 모습은 예전의 버스보다 더 흉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행선지를 알려야 하는 것이 버스의 우선적 임무요,
손님을 더 많이 태워야 하는 것이 버스회사의 목적이라
버스회사에서는 아름다운 디자인을 지키는 호사스러움을 누릴 수는 없었다.
이미 그때부터 버스 디자인은 안하느니만 못한 모습으로 변해갔다.
그것도 모자라 다른 한쪽 옆면에 광고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버스회사의 수익구조와 경영상태에 대해서 미리 알았다면
버스 디자인을 하는 사람은 차라리 광고가 들어가는 것을 예상하고

버스를 디자인했어야 했다.
광고는 가능한 공간만 주어지면 어떤 크기에 관계없이

자리잡고 들어가는 특성이 있다.
하물며 심플한 세련미를 강조하기 위한 넉넉한 여백이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을까.

결국 현재 시내버스는 원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광고판이 붙여지고 예전의 행선지 표시가 옆면에 가득 채워진,
이것도 저것도 아닌 기이한 모습으로 변했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였을까.

 

 

우선 실제로 벌어질 상황을 예상하지 못하고

책상에 앉아서 디자인 한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승객의 성향을 모르고 버스회사의 수익구조에 대해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단지 세련되어 보이면 그게 제일 좋은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너무 빨리 커다란 변화를 시도했다.
세련된 디자인을 실생활에 적용하려면 반드시 겪고 가야하는 중간 과정이 있다.
그 과정이 생략된 채 몇 단계를 뛰어 넘는 디자인을 했으니
승객이나 버스회사가 감당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실적 위주의 행정과 탁상 중심의 행정이 빚어낸 실수다.

 

 

디자인은 그 목적과 기능에 우선 충실해야 한다.

그 다음이 보여지는 멋이다.
단지 멋있기만 할 뿐 그 본래의 목적에 충실하지 않으면

그런 디자인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과감히 멋을 포기할 줄도 알아야 그게 진짜 디자인이다.

 

 

어디 디자인만 그럴까. 사람 멋내는 일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것을 갖춘 뒤에야 멋이 나온다.
멋만 낼 줄 안다면 뭔가 잘못 된 것이다.
우리는 그 간단한 사실을 지금 시내버스를 통해 다시 확인하고 있는중이다.

 

 

 

 

 

 

 

 

 

 

 

 

 

아하누가

이글을 쓰고 몇년 뒤 그 사업을 주도한 사람은 대통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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