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칼럼

이창호

아하누가 2024. 1. 17. 20:36


세상 돌아가는 일이 워낙 급박하게 움직이니
웬만큼 강도 높은 뉴스가 아니면 기억 속에 오래 남아 있을 틈이 없다.
이러한 메가톤 급 뉴스들의 큰 특징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기사들이 연이어 나오는 것으로,
뉴스로 먹고사는 매체들의 밥줄을 든든히 받쳐줄 요소를 안고 있다.
그러다보니 정작 사회적으로 중요하게 인식해야 할 뉴스들도
단발성 뉴스라는 이유로 금방 다른 뉴스에 덮혀진다.
한마디로 말해서 뉴스에서 또 다른 뉴스가 생산되지 않으면
뉴스를 다루는 매체에서 싫어하는다는 말이다.
따라서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뉴스들도

무성한 뒷얘기를 만들 여지가 큰 것들이고
또한 매체들은 그러한 뒷얘기를 우려먹으면서 밥줄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잠시 잊고 있었던 지난 뉴스 한가지를 발견하곤
연발성 뉴스만이 긴 생명력을 가지는 뉴스의 나쁜 면을

또 한번 인식하게 했다.

 

 

 

지난 2005년 2월 27일.
중국에서 열린 <농심배 세계바둑 대회>에서 이창호 9단이 연승을 거두고

한국팀이 우승했다.

잠깐 여기서 농심배 바둑대회의 독특한 경기방식을 살펴보자.
농심배 바둑대회는 현존하는 바둑대회중 유일한 국가대항 단체전 바둑대회다.
한국, 중국, 일본 3개국만 참가하는 대회니

국제대회라는 명칭이 다소 어색하긴 하지만,
바둑이라는 경기의 특성으로 볼 때는 오히려 명실상부한 국제대회인 셈이다.

일단 각국 5명의 선수가 출전한다.
처음 두 나라의 1번 선수들이 격돌한다. 당연히 누군가 이긴다.
진 사람은 짐 꾸려서 집에 돌아가고

이긴 사람은 그 다음 나라의 1번 선수와 계속 바둑을 둔다.
당연히 또 누군가 이긴다.
진 사람은 짐싸서 집으로 돌아가고 이긴 사람은 계속 남아

다음 나라의 2번 선수를 맞는다.


이런 식으로 돌아가다 보면 어느나라는 아직 선수가 2명 남아있고
어느나라는 3명 남아 있을 수도 있고

어느 나라는 이미 5명이 다 집에 돌아갔을 수도 있다.
이렇게 누가 끝까지 남아있는냐로 우승을 다투는, 이른바 '승발전'이다.

 

올해로 6회째를 맞는 이 대회는

지난 다섯번의 대회에서 한국이 모두 우승했다.
이창호를 비롯, 조훈현, 서봉수, 유창혁 등이 무섭게 활약했고
이를 계기로 일본과 중국은 타도 한국의 기치를 세우며

인재발굴과 기술연마에 매진했다.

6회째를 맞는 이번 대회에선 이변 아닌 이변이 일어났다.
매번 초번부터 승승장구하던 한국이

단 1승만을 거둔채 4명의 기사가 줄줄이 고배를 마신 것이다.
이제 남은 기사는 주장 이창호 9단 한사람.
일본은 2명의 기사가 남아 있고 타도 한국을 외치는 중국은
무려 3명의 기사가 여유롭게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한국 주장 이창호가 한판이라도 지면

한국의 우승은 물 건너갈 상황.
이어지는 다섯판의 바둑은

단 한번의 조그만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긴박한 상황.
자, 결과가 어떻게 됐을까.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이창호 9단은 다섯명의 기사를 차례로 꺾었다.
다섯판의 바둑중 컨디션 조절 실패나 단순 실수도 있을 듯한데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이창호는 그의 별명 '돌부처'마냥 든든히 버티며
한국의 6번째 우승신화를 만들었다.

대견하고 놀라우며 또한 마음이 든든해진다.
더욱 기분좋은 것은 무려 20년에 가까운 시간을 꾸준한 노력과 개인 연마,
그리고 대세를 거스르지 않는 마음가짐으로

이러한 결과를 가져오게 했다는 점이다.
사필귀정의 표본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편법과 얄팍한 속셈이 진리보다 판치는 세상 일에 커다란 교훈을 준 것 같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골프 선수보다

이런 사람에게 훈장이라도 줘야 하는 것 아닐까?

 

 

 


 * * *

 

 

 


한국의 6연속 우승을 만들고 귀국한 이창호 9단에게
기자가 '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창호의 대답은 뜻박이다.

 

 

“인생도 즐기고 싶습니다. 지금까진 바둑 외길을 달려왔어요.
바둑에 대해 최선의 자세는 유지하겠지만 바둑 외에 하고 싶은 일이 많습니다.”

 

 

 

이제 이창호도 소년기사가 아니다. 벌써 서른줄에 들어섰다.
그저 바둑만 알고 바둑만 두며 살아가길 바라지 않는다.
이제 기사 이창호가 아닌 인간 이창호도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아도 된다.
그동안 너무 많은 공을 세웠다.

이제 좀 쉰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를 원망하지 않을란다.
비록 고등학교 11년 후배지만

항상 많은 걸 가르쳐주는 인생의 도사님 정도로 기억할 것이다.

다시 한번 이창호의 선전과 우승을 축하하며
그의 일생이 사회적으로 조금 더 부각되기를 기대해본다.
다른 스포츠 스타나 연예인들에 비해 우린 이창호에게 너무 야박했다.

 

 

 

 

 

 

 

 

 

 

 

 

아하누가

그래도 나는 이창호의 선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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