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적인 분야에 관심이 매우 많은 편이다.
그러다보니 스포츠도 좋아하고 음악 듣는 것도 좋아하고 아무튼 다양하게 좋아한다.
어쩌면 내가 술을 안 먹는다는 사실이 그런 것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한가롭게 더듬어 본다.
언젠가 한번 정리하고 싶은 생각들이니 이 늦은 밤은 그런 감상에 젖기에
제법 적당할 것 같은 느낌이다.
1. 프로기사 유창혁
바둑에 대해 조금만 아는 사람이면 저 이름을 알 것이다.
조훈현, 이창호와 트로이카를 이루는, 화려한 공격을 자랑하는 바둑의 프로기사다.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내 고등학교 후배이기도 하지만 (같은 학교를 나왔을 뿐
서로 얼굴도 알지못하는 졸업생명부상의 후배다) 그의 화려한 碁風이 좋아서다.
특히 바둑이 유리한 상황이라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또 공격에 나서는 그런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시원함과 통쾌함을 전해준다.
뿐만 아니라 큰 대회일수록 힘을 발휘하고 가끔씩 쉬운 상대에게도
맥없이 나가 떨어지기도 하니 이 얼마나 인간적인가?
신문에 유창혁 기사의 보도가 날 때마다 빠짐없이 읽는다.
그리고 큰 대회라도 있을 때면 멀리서 힘찬 응원을 하곤 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중에 아직 가장 활발하게 활동을 하는 사람이다.
창혁아, 올해는 우승 몇번 더 하자.
2. 축구선수 김종부
이 비운의 선수를 기억하는 사람은 축구팬 아니고는 많지 않다.
순간적으로 터져나오는 폭발적인 슈팅과 화려한 골결정력은 한국 축구에 있어
가장 위대한 스트라이커로 성장할 수 있는 충분한 소질을 갖추었다.
그러나 그러던 그가 대그룹(현대와 대우)의 스카우트 파동에 휘말려
너무도 비참하게 날개를 펴지 못한 채 축구화를 벗었다.
나이는 나랑 같은 용띠. 그의 은퇴는 마치 내 나이가 운동선수로서 저물어가는
씁쓸한 기분을 맛보게 했고
다시는 못볼 그의 축구하는 모습을 기억속에 오래 담아두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1990년인가? 잠깐 재기에 성공할 것 같이 반짝했을 때 내가 얼마나 기뻐했나.
그리고 이후로 슬럼프에 빠져 재기를 위해 노력할 때
내가 얼마나 운동장마다 찾아다니며 응원을 했었는지....
지금은 거제고등학교 축구팀 감독으로 있다고 한다.
그의 남은 축구인생도 <비운의 스타>라는 꼬리표처럼 되지 않기를 절실하게 바란다.
3. 영화 once Upon A Time In America
사람은 아니지만 인격을 부여도 모자람이 없는 영화 한편.
그것은 영화가 아니라 내게는 한 권의 명작이요 또한 한폭의 명화나 다름없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배우는 로버트 드 니로와 제임스 우즈고
여배우로는 엘리자베스 맥거빈을 제일 좋아하고,
제일 좋아하는 영화감독은 세르지오 레오네,
제일 좋아하는 영화 음악가는 에니오 모리꼬네다.
다시 말하면 이 영화에 나온 사람이 제일 좋고
그 영화를 만든 사람이 제일 좋다는 뜻으로, 내게 있어 영화는 이 영화 뿐인 것 같다.
1985년 6월. 이 영화를 서울 명동의 코리아 극장(지금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음)에서 봤다.
그리고 그 다음주에 군에 입대. 힘든 훈련소 생활에서도
문득 문득 나를 감상에 젖게 만든 영화.
도무지 뭐가 뭔지 머리속에서 정리가 되질 않아 머리만 아팠던 영화.
그러나 그럴수록 자꾸만 생각나 잊을 수 없는 바로 그 영화.
제대하고 비디오를 빌려서 보고 또 보고.
일년에 한번씩 영화보는 주간을 만들어 매년 한번씩 되돌려 보던 그 영화.
7번째 보면서도 몰랐던 부분을 알게 되는 깊은 영화.
난 아직도 once Upon A Time In America가 좋다.
4. 만화가 고우영
이 만화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저 알기만 할뿐
깊게 들여다본 사람도 주변에는 많지 않다. 고우영 만화는 내 상상의 원동력이다.
반복학습을 무척 좋아하는 내게는 집 책장에 두칸이나 차지하고 있는
고우영 만화책이야 말로 좋은 휴식이요 또한 건전한 재충전의 충실한 계기를 만들어 준다.
삼국지는 이문열 보다, 정비석 보다 고우영이 좋다.
5. 드라마 연출가 황인뢰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천사의 선택>, <샴푸의 요정>, <고개숙인 남자>,
<창밖에는 태양이 빛났다>.... 나는 저 제목만으로도 쉽게 흥분한다.
내가 주말마다 다른 일을 마다하고 집에 꼭 들어와야 했던 사람.
드라마를 보고 감동하는 건 남의 일인줄만 알았는데
그것이 남의 일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된 사람. 만난적도 본적도 없지만
그의 탁월한 감각을 나는 인정한다. 내가 인정해서 뭐하랴만 그래도 나는 좋다.
한때는 황인뢰 드라마만 골라 TV옆에 스케쥴 작성하듯 죽 적어두었던 적도 있었으니
내게 있어 정말 대단한 일들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50여회의 콘서트 관람 기록을 가지고 있는 록 그룹 <들국화>,
뛰어난 센스를 자랑하며 덩치 큰 선수를 이겨내던 테니스 선수 <마이클 창>,
생각은 안나지만 기억에서 사라진 많은 사람들이 좋아서 그 사람의 활동에 일희일비하며
지내니 역시 마음속의 스타나 우상은 반드시 필요한가보다.
* * * *
오늘은 모처럼 운전을 했다.
자동차 CD플레이어에는 언제나처럼 JANIS IAN의 노래가 나온다.
JANIS IAN.
아마 내가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그러니까 팬으로서 아니 매니아로서 제일 충성도를 보이는 사람이 아닐까.
짙은 허스키 보이스의 호소력 강한 창법, 알 듯 모를 묘한 분위기,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노래들.
내가 팬으로서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중에 가장 좋아하는 사람을 고르라면
생각할 가치도 없이 단연 JANIS IAN이라 말한다.
지금은 이미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지만 아마 내 기억속에서 그의 노래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JANIS IAN의 음반이 16장 있다.
한두곡도 아니고 무려 200곡에 가까운 그의 목소리들이 나를 즐겁게 해주니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리고 팬으로서 충실히 의무를 다하고픈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런 좋은 감상들은 먹고 살아야 하는 당장의 급한 문제를
해결하기 전엔 즐길 수 없는 일이다.
그게 또한 딜레마요 좋은 것을 더 소중하게 만들어주는 세상의 섭리이기도 한 셈이다.
누군가 내게 '왜 사느냐'는 사춘기 스타일의 질문을 한다면 나는 '만족'이란 것 때문에
산다고 답할 것이다. 그 만족을 위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응원하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 즐긴다.
그리고 또한 그 즐거움을 위해 내가 당장 먹고 사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세상 살아가는 일도 그리 억울하지 만은 않은 것 같다.
아하누가
2013년 현재, 유창혁은 바둑TV 해설자로 활동중이고
김종부는 동의대 감독, 고우영 화백은 고인이 되었다.
들국화는 기적처럼 부활했다.
그리고 나는 2004년 싱가폴에서 JANIS IAN 콘서트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