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썰렁하다는 표현은 어느덧 일반적인 표현이 되어 무척이나 폭넓게 쓰입니다.
아주 천박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예의없는 것 같지도 않으니
꽤 적절한 표현인 셈입니다.
주로 누군가 주제에 맞지 않는 말을 했을 때,
웃기려고 노력했는데 씨알도 안 먹힐 때
또는 분위기도 파악 못하고 나중에 얘기에 참견해서 엉뚱한 소리를 할 때....
이럴 때는 정말 ‘썰렁’하다는 표현말고는
다른 말로 그런 상황을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참 적절한 표현입니다.
하지만 앞서 나열한 것 뿐만 아니라 썰렁함이란 단어가 적절하게 적용되는
또 한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누군가에 의해 모두가 민망해지는 상황이 연출되는 경우가 바로 그 경우입니다.
2
대학 다닐 때의 일입니다.
워낙 여학생이 많은 과인데다 신설학과여서 선후배도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2학기를 맞이하게 되었는데 학생들 대부분이 그전 1학기때
과대표를 맡았던 학생에게 불만이 많았었습니다.
그래서 겸사겸사 친목도 다질겸 과대표를 선출하는 모임을 가지게 되었는데
전례가 없다보니 중구난방으로 의견만 돌출되지
결론이 쉽게 날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급기야 목소리도 커지고 감정도 대립되고 싸우지 않아도 될 일을 가지고
서로 싸우게 되었지요.
그것도 여학생파와 남학생파로 갈려서 말입니다.
그때 마침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한 녀석이
모두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야! 조용히 안해? 이 씨X년들아!!!!!!!”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씨X놈들아! 라고 말해도 민망한데 ‘년’이라는 원색적인 용어를
모자이크 처리도 하지 않고 글자 그대로, 발음나는 그대로 소리를 쳤으니
분위기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모두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할 말도 없었고 말할 엄두도 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나서서 따질만도 했는데 그 욕의 주인공이 되는게 싫었던지
다들 조용히 옆사람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한 친구는 무척이나 화난 얼굴로
어리둥절하고 있는 사람들을 매섭게 쏘아보고는
문을 신경질적으로 닫으며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 뒤로 약 10분 가량 아무 말도 못하고
분위기만 살피고 있었습니다.
다음날 그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사건의 전말에 대해 물었지요.
무슨 일로 화가 그리 많이 났느냐고.
하지만 그 친구는 의외의 답변을 했습니다.
“그게 아니라.... 싸우는게 유치해서 니네들한테 ‘씨X놈들아!’ 라고 말하고
분위기 바꾸려 한다는게 그만 잘못 말했지 뭐냐. 나도 기가 막히더라구.
하지만 어떻게..... 이왕 한거... 그냥 나갔지 뭐~”
태어나서 겪은 최고의 썰렁한 분위기를 만든 바로 그 친구는
주변의 차디찬 눈총을 견디지 못하고
한 글자 실수로 결국 그 학기를 마치지 못한 채
해병대에 자원 입대하게 됩니다.
3
직장 다닐 때의 일입니다.
부서 회식이 한창이던 자리에서 옆에 앉은 여직원이 거나하게 취해 있었습니다.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그저 가벼운 농담을 주고 받고 있던 어느 순간이었습니다.
어느 말 끝에 내가 ‘엑스(X)나게’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감출려고 표기를 X로 한 게 아니고
그냥 소리나는 대로 ‘엑스나게’라고 말했던 겁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설명하려 했습니다.
“다음 중 엑스(X)에 해당하는 말을 뭘까요?
1번 신, 2번 땀, 3번 열, 4번 허벌...”
그 말은 내가 개인적으로 ‘X나게’라고 말한 뒤에
반드시 쓰는 표현이기도 하고 즐겨 쓰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말하고 나서 위트 넘치는 그 보기를 들어준다는 건
나만의 짧은 생각이었고
그 여직원은 내게 보기를 들어줄 시간적 여유도 주지 않은 채
내 말이 끝나자마자 큰 소리로 대답하고 말았습니다.
“나 알아... 존나게...그치? 존나게!”
하늘도 무심하지 하필이면 그 순간은 자리에 함께 한 사람들의 대화가
잠깐 끊기는 순간이어서 모두들 그 이야기를 듣고야 말았습니다.
엄청나게 분위기가 썰렁해졌습니다.
감히 ‘썰렁’이란 단어 말고는 다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잠깐의 순간에 ‘숙연’, ‘엄숙’, ‘심각’, ‘어색’, ‘긴장’, ‘초조’ 등의 단어를
이 상황에 대입해 보았지만 ‘썰렁’ 만큼 적절한 표현은 없었습니다.
잠시 상황의 심각함을 뒤로 한 채
나의 뛰어난 어휘력에 스스로 감동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나야 상황을 썰렁하게 한 당사자는 아니니까 모른 척 할 수도 있었지만
엄밀히 따지면 동기를 부여한 책임도 있었기에 약간의 책임감을 가지고
어떻게든 다른 방향으로 화제를 돌리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술 한잔 들어간 그 여직원은
계속 그게 답이 맞냐고 큰 소리로 묻고 있었습니다.
주변은 더 조용해졌습니다. 분위기는 정말 어색했습니다.
썰렁하다는 말 말고 이런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았습니다.
4
몇년전에 어떤 학원을 다닌 적이 있습니다.
수강생은 물론 강사들도 모두 젊은 사람들이어서
몇몇 사람은 아주, 매우, 빈번하게, 자주 어울리곤 했습니다.
그런 어느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어떤 술자리에서 얘기 꽃을 피우고 있었는데
누군가 이런 농담을 했습니다.
“너 차 안에서 해 봤어?”
뜬금없는 질문 같지만 사실 그 질문의 내용은
차 안에서 하늘에 떠있는 ‘해’를 봤냐는 질문입니다.
그렇게 애매한 질문을 막연하게 하고는 상대방이 당황스러워 하는 모습을
즐기는, 꽤 오래전에 유행했던 농담이었죠.
그런데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그런 유머를 처음 들었는지
무척 재미있어 했고 또 즐거워 했습니다.
한참동안 그 얘기를 하고 있던 순간
이제 막 강의를 마친, 매우 활달한 성격을 가진
여강사 한명이 뒤늦게 자리에 합류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장난기 심한 한 사람이 그 여강사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그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강사는 성격이 솔직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오랜 외국생활 때문에
사고가 남달랐는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응 해봤어. 베스타 안에서...”
물론 농담임을 알고 농담으로 맞받아치는 의도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도 약간은 쑥스럽다는 표정과
지나치게 솔직했다는 후회섞인 표정도 보였습니다.
주변이 썰렁해졌습니다. 모두가 어쩔줄 몰랐습니다.
대답한 여강사는
모두들 각자 자신의 경험을 말하는 시간인줄 알았던 것 같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차마
‘아니, 그거 말구… 차안에서 하늘에 있는 해 봤냐구?’라는 말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말을 하느니 차라리 조직폭력배 소굴에 가서
‘야 임마! 니네 두목 나오라 그래!’라고 떠드는 게 더 나을 것 같았습니다.
어색한 침묵은 계속 흐르고
한 친구는 일부러 방귀라도 뀌어 상황을 반전시켜 보려고
갖은 인상도 써보았지만 분위기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정말 1분이 1년 같이 느껴졌습니다.
세상에 또 이렇게 썰렁한 경우가 있을까요?
그동안 벅찬 감동이나 가슴 저미는 애절한 사연 등이
생활의 신선한 자극으로 받아들여지고 또 그렇게 얘기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돌이켜보니 이에 못잖게 썰렁한 추억들도
생활의 작은 자극이 되는 것 같습니다.
오래전 일들이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나니 말입니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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