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글 긴 얘기

욕의 사회적 순기능

아하누가 2024. 6. 30. 01:30


 1

후배 한 녀석이 사귀던 여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여자가 후배에게 별안간 이별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 여자의 생각이었고

후배 녀석은 어떻게든 그 여자를 붙잡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치맛자락이라도 붙들고 늘어지고 싶은 심정으로

몇날 몇일을 계속 설득하고
이해시키며 마음을 돌려보려고 갖은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도 그 여자의 마음은 쉽게 변하지 않아

후배 녀석의 마음 고생은 제법 심각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후배는 그 여자를 만났습니다.
최후의 방법이라 생각하고

갖은 아양과 비굴, 재롱과 읍소로 마지막 설득을 시도했지요.
한마디로 치마자락을 붙잡고 늘어지고 있는,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습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감동적인 순간이었답니다.

제법 읍소작전이 먹혀들어 가려는 분위기가 될 듯한 바로 그때,
커피숍에서 이런 노래가 막 흘러 나왔습니다.

 

 

 “이제는 애원해도 소요~옹 없겠지....~~”

 

 정말 절묘한 타이밍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가수의 목소리도 껄쩍지근하면서 간드러지기 그지없어

분위기는 치마자락이 아니라
다리 몽둥이를 붙잡고 늘어져도 안되게 되었습니다.
그 노래를 들으면서 후배는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X발! ..... 야! 가라~ 가!!!!!”

 

 

한마디 욕으로 깨끗하게 마음의 정리를 한 그 후배의 얘기를 들으면서
욕이 가지는 사회적이고 긍정적인 기능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오래전 일이었고

그 후배는 지금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 잘 살고 있습니다.

 

 


2
20대 중반에 처음 직장에 취직했습니다.
비단 직장 뿐 아니라 처음 가는 곳의 신참은

모든 것이 조심스럽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일수록 친해지려고 섣불리 가볍게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하는 수 없이 성격에 어울리지 않게 며칠간 점잖게 앉아 있었습니다.
묻는 말에 답하는 짧은 단어 몇마디 빼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날 보고 말이 없다는 얘기를 할 때면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고
살며서 자리를 옮겨 화장실에서 참았던 웃음을 웃으며

오도방정을 떨곤 했었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이 되어가던 어느 날 친구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사무실로 날 찾는 전화로는 처음 걸려온 전화였습니다.
모두들 내가 전화를 받으니 관심 가득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 전화하는 친구들의 대화 내용은 중요한 내용이 아니라
대부분 쓸 데 없는 말 장난 뿐이게 마련입니다.

조용히 전화를 받다보니 사무실에서 일부러 말을 아끼며 지내던 스트레스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흥분했습니다. 이미 긴장은 사라진지 오래였습니다.
점점 친구와의 대화가 평소 말투로 바뀌다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뭐라구? 야~이 씨X놈이... X까고 있네~”

 

 

그리고 뒤통수가 썰렁해져 힐끔보니 모두들 입을 한참이나 벌린 채
차마 다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혼돈의 틈에서도 나는 이왕 엎지러진 물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바지가 반쯤 내려가야 쪽팔리지 다 내려간 다음에는 쪽팔릴 것도 없다는 것이
나의 오랜 지론이기도 했습니다. 계속 큰 소리로 떠들었습니다.

 

 

“그 새X들 다 기다리라 그래! 좀만한 것들이~”
“니미 씨X 개지랄들 하고 있네...”

 

 

전화를 끊고 가만히 자리에 앉아 하던 일을 했습니다.

표정 관리에도 무척 신경을 썼습니다.
등이 따갑고 뒤통수가 시큰거렸지만 대수롭지 않은듯 묵묵히 앉아 있었습니다.

 

훗날 이 사건은 전 직원 사이에 회자되어 나는 무언가 있는, 무언가 있어 보이는
대단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었답니다. 몇달 뒤에는 모범사원까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일을 잘해서가 아니라 욕한 것 때문에 회사 쫓겨날까봐
죽어라고 일했던 까닭입니다.
가끔씩 욕도 해볼만 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3
컴퓨터 통신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을 나이니까 아마 30대를 넘어선 때였을 겁니다.
컴퓨터 통신을 처음하면 누구나 제일 재밌는 것이 채팅일 겁니다.
그래서 열심히 채팅을 했습니다. 밥 먹고 하고 밥 먹기 전에도 하고
잠자다가도 일어나서 하고 자면서도 하고…
그러던 어느 날 이상한 제목의 대화방을 발견했습니다.

 

 # 14 공 개 (4/6) [ssiba1234] 중학생 욕방~~~

 

세상에...... 노래방이나 빨래방은 봤어도 욕방은 처음 봤습니다.
뭔가하고 들어가 보았더니 이건 난리가 아니었습니다.

 

 

중삐리1 : 야! 빨리 와! 이 씨X놈아!
중삐리2 : 인사해봐, 이 좀만아!
나 : ?
 
 

아! 그러니까 중학생들이 욕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잠시 당황했지만 서른도 넘은 나이에 애들 욕에 당황하면 나이가 서러워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반격에 나섰습니다.

 

 

중삐리1 : 너 이 씨X놈! 몇 학년이냐?
나 : 중2다. 이 신내기사빠중사삐야!
중삐리2 : 어라? 이상한 욕이네? 그게 뭐냐?
나 : 니넨 무슨 판데 이런 욕도 모르냐? 이 남바씨비조삐아~
중삐리1 : 파? 욕에 그런 것도 있냐?
중삐리2 : 파? 그게 뭔데?
나 : 나는 태극무진 갑공설청 만방궁진 소호파다!
중삐리1 : ?
중삐리2 : ??

 

 

사실 그런 파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저 아무 글자나 타이핑 한거지요.
근데 그 학생들은 몹시 심각했습니다.
잠깐의 공백이었지만 그들이 몹시도 흔들리고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한 술 더 떴지요.

 

 

나 : 조금 이따가 해동청표 바라금산 통추파가 온다니까
나 : 니네들 준비하고 있어.
나 : 원단님이신 옥환거두 말황금진님도 오신대
중삐리1 : ??
중삐리2 : ???

 

 

그리고 나는 유유히 대화실을 빠져나갔습니다.
거기에 있던 중학생들은 아마도 많은 생각을 했을 겁니다.
그리고 욕이란 것도 무언가 체계가 있고

전통이 있어야겠다는 생각도 했을 겁니다.
지금은 대화실에 그런 학생은 없을테고

또한 그때의 그 학생들도 지금은 대학생이 되어
중학생에게 과외공부를 시키고 있을 겁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가르치는 중학생들에게 욕의 전통과 체계에 대해
따끔한 충고를 하는 것도 있지 않을 겁니다.

 

 

이제는 그때보다 나이가 더 많아져 욕도 하지 못합니다.
오래전 친구들이나 만나야 겨우 할까 말까 하는데 대부분 부인도 있고
자녀들도 있는 자리에서 만나니 그럴 일도 없습니다.
가끔씩 시원하게 욕도 하면서

진하디 진한 옛 우정을 확인하고 싶은데 말입니다.

 

 

 

 

 

 

아하누가

 

 

 

 

'짧은 글 긴 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발음의 중요성에 대한 일화  (0) 2024.06.30
썰렁의 극치  (0) 2024.06.30
소설  (0) 2024.06.30
체험으로 느끼는 속담의 교훈  (0) 2024.06.30
표현  (0) 2024.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