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람들은 가끔 별 것도 아닌 일 가지고
자신이 더 뛰어나다는 사실을 확인시키고 또 자랑하려 합니다.
참 우스운 일입니다.
가난한 얘기가 주제가 될 때는 그게 뭐 자랑이라고 자신이 더 가난하다고
핏발을 세우기도 하고,
음식 잘먹는 얘기해도 시간가는 줄 모르며 떠들어 댑니다.
그러다가 남자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군대에서 누가 더 고생했냐는 얘기라도 나오면 그날은 밤을 새워야 합니다.
남에게 지기 싫은 본질적 생각들이 늘 잠재해 있거나
아니면 이 사회가 너무 1등만 요구하는
각박한 환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멍청하게도 게으른 성격을 가지고도
서로 뛰어나다고 열변을 토하게 되는 일도 있으니
이거야 정말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성격이 몹시도 게으른 편입니다.
게으른 정도가 지나치지만 스스로는 그것을 인내라고 말하며
또한 그것을 매우 아름다운 미덕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2
식구들이 모두 이민가서 막내 동생인 남동생과 둘이 살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나는 직장인이었고 막내는 학생이었습니다.
둘이 살아도 그다지 어려운 문제는 없었는데 한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밥을 지어먹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천성적으로 게으른 나는 밥을 짓는 일은 고사하고
밥상을 스스로 차려본 적도 없었습니다. 언제나 그 일은 막내의 일이었던 셈이죠.
그런데 어느 주말은 막내가 1박 2일로 MT를 떠났습니다.
마침 다른 약속도 없어 집에서 쉬고 있는데 배가 고프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밥을 차려먹기 귀찮아 그냥 참았습니다.
토요일이라 TV도 재미있고 해서 그날은 그냥 그런대로 지낼만 했습니다.
다음날인 일요일엔 당연히 더 배가 고팠습니다.
수많은 음식들이 머릿속을 헤엄치듯 지나갔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음식들의 끝엔 막내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막내만 들어오면 저것들 다 사가지고 오라고 시켜야겠다는 생각을
굳게 다지고 있었습니다.
오후가 되니 더 힘들어졌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토요일 점심 식사 이후엔 아무 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막내가 밥을 지어놓고 갔는데도
밥상 차리기 귀찮다는 오직 한가지 이유로 참았습니다.
더 이상 몸을 움직이면 칼로리만 소모될 것 같아 죽은 듯이 누워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막내 생각을 했습니다.
산타클로스 복장을 한 막내가
치킨이며 햄버거를 자루에서 꺼내는 상상이었습니다.
겨울철도 아니었는데 창밖에는 눈이 오는 것처럼 느껴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녁이 되어도 막내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배가 너무 고파 숨도 천천히 쉬어야 했습니다.
눈꺼플 열고 닫을 때도 가만히 움직였습니다.
TV소리가 시끄럽게 느껴져 그냥 꺼버렸습니다.
하지만 TV는 리모콘으로 끌 수 있었지만 형광등은 일어나서 꺼야 했기 때문에
그냥 켜둔 채 누워 있었습니다.
늦은 밤이 되서야 막내가 돌아 왔습니다.
누워 있는 나를 보고는 놀란 목소리로 황급히 물었습니다.
“형! 어디 아파? 왜 그래?”
나는 이제는 살았다는 희망에 젖어
생존 확인의 기쁨과 식도락의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밥.. 좀... 차려주라....”
막내는 아직도 이때의 일을 기억하며
날보고 인간도 아니라는 말을 자주 하곤 합니다.
막내는 인내력이 없어서 큰 일입니다.
3
아무리 게을러도 샤워는 합니다.
한마디로 샤워를 하지 않을 성격의 게으름이 아니라
조그마한 일을 싫어하는 게으른 성격입니다.
샤워를 하고 나서 수건으로 물기를 다 닦은 후
팬티를 입기전에 조금 더 말리느라 그냥 서 있었습니다.
그러다 가만히 바닥을 쳐다보니 비누가 있었습니다.
비누곽은 열려진 채 바닥에 비누가 보기 흉하게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저 비누를 잡아서 비누곽에 넣으려면 손에 또 물을 묻혀야 하지 않습니까?
겨우 몸을 다 닦았는데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슬리퍼 신은 발로 비누를 잘 다루어서
비누곽에 넣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헌데 그 일이 예상보다 쉽지 않아 몇번을 반복하게 되었습니다.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비누를 밟아 미끄러지듯 바닥에 넘어졌습니다.
팔꿈치가 무척 아팠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넘어지면서 허벅지 부분부터 겨드랑이까지 비누가 다림질을 하듯
지나가 버린 것이었습니다.
다시 몸에 물을 묻히려고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말렸습니다. 한참을 말리고 나니 제법 괜찮아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속옷을 입고 얼른 나갔습니다. 조금 찜찜했지만
그래도 다시 샤워를 하지 않았다는 성취감에 젖어 그런대로 좋은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오후 들어 내내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땀이 날 때마다 몸 어디선가 거품이 일어나고 온몸이 뱀이나 아메바가 된 것처럼
미끌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걸어갈 때는 팔과 몸통이 스치는 겨드랑이 부분이 미끌어져
원래 예상한 속도보다 빨리 걸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게으르면 여러가지로 고생한다는 생각보다는 며칠이 지나야
이 미끌거리는 게 없어질까 하는 궁금증이 먼저 생각났습니다.
한편으로는 겨드랑이가 미끌거려 더 빨리 걸을 수 있으므로
이를 한국 육상선수들에게 알려줘야겠다는 숭고한 생각도 했습니다.
난 역시 게으른 사람이 맞긴 맞나 봅니다.
4
게으른 것은 분명 자랑이 아닙니다.
게으른 성격 또한 분명 자랑은 아닐 겁니다.
그러니 이렇게 게으른 예전의 일화를 자랑삼아 써서도 안될 겁니다.
다만 나의 게으른 성격은
남들이 볼 수 없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벌어진다는 것이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될 뿐입니다.
그러니 모두들 부지런히 삽시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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