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글 긴 얘기

작가

아하누가 2024. 6. 30. 01:34


 

1
인터넷에 글을 올리면서부터

주변의 사람들은 나를 가리켜 ‘작가’라고 놀리듯 불렀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놀리는 것 같기도 했지만 번데기도 아니고
날라리도 아닌 ‘작가’라는 좋은 호칭을 써서 불러주는데
그걸 기분이 나쁠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쑥스럽다고 해야 맞는 표현이겠지요.

 

그러던 어느 날은 운 좋게 책까지 내게 되었습니다.
호칭도 ‘작가’에서 ‘인기작가’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다 신문과 잡지 몇군데에 이름이 오르내리더니 호칭이 또 한번 바뀌었습니다.

‘인기작가’에서 ‘국민작가’로 바뀐 것입니다.

내가 자주 가는 어느 동호회에서는 아예 ‘궁민자까’라고 부릅니다.
문자의 모양상 어째 놀림의 의미가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이를 애써 통신식 표현이라 해석하며 그런대로 좋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아마도 국내 최고의 유명 작가들이 보면 씁쓸한 미소를 지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2
그러던 어느 날 사무실에 아르바이트 근무자를 채용했습니다.
며칠 일하던 아르바이트 학생은 내가 주로 하는 일이 무언지 궁금해졌나 봅니다.
그러더니 내게 글 쓰시는 분이냐고 물었습니다.
뭐 대단한 글도 아닌데 글을 쓴다고 말하기가 좀 부끄럽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책도 냈다는 자랑도 하고 싶은데

그걸 자기 입으로 말하자니 그것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때 같이 일하던 동료가 고맙게도 대신 대답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유명한 분이라고 말을 했던 거지요.
시기 적절하게 나타나는 그 직원이 무척이나 센스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그 아르바이트 학생은 대표적인 작품이 뭐가 있냐고 물었습니다.
당연한 질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동료가 나의 대표적 명작
<힘센마누라는 여자보다 아름답다>라고 대답할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게 무슨 책인지 알 리가 없겠지만

그래도 얼핏 듣기엔 제법 책 제목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동료사원은 그런 뻔하기 그지 없는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는 대답을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혹시 텔레토비와 국회의원의 공통점이란 글 알아요? 매우 유명한 글인데...
그 글을 이분이 쓰신 겁니다”

 

 

쩝…….

아무리 생각해도 매우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3

자주 만나는 동호회 후배들하고 술집에 갔습니다.
술판이 거나하게 벌어지고 분명히 같이 간 여자들은 없는데 옆에 여자들도 앉는,
조금 비싼 술집입니다.
그런 술자리에서 마주 앉은 한 후배가 괜히 심심해서 그랬는지
옆에 있는 아가씨에게 나를 가르키며 아주 유명한 작가라고 소개를 했습니다.
그저 그러려니 하며 넘겼는데 예상외로 그 아가씨가 그 말에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뭐 말해봐야 알지도 못하겠지만 그래도 어쩐지 말하기가 싫었습니다.
제목도 힘센 마누라는 어쩌고 저쩌고 하며

유부남이라는 공식 명칭을 달고 있는데 그거 말해봐야 집안 망신입니다.

또한 그렇다고 우리 마누라하고 싸우려 하겠습니까?

 

그래서 그 후배에게 괜한 소리하지 말라는 표정을 살짝 지어 보였습니다.
다행히 그 후배는 내 눈짓을 잘 알아차렸고 뿐만 아니라
그 후배는 국내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순발력과 응용력이 뛰어난 후배여서 오히려 한 술 더 뜨기 시작했습니다.

다음은 그 후배와 술집 아가씨와의 대화 내용입니다.

 

 

아가씨 : 무슨 책 쓰신 작가에요? 유명해요?
후배 : 응... 너 ‘토지’라는 책 알지? 아주 유명하지?
아가씨 : 응 알지.... 제목은 들어봤어...
후배 : 바로 그 토지를 능가한다는 ‘땅’이라는 책이 있어. 바로 그 책의 저자님이시지.
아가씨 : 정말야? 저 아저씨가 ‘땅’의 저자란 말야?
후배 : 그럼. ‘땅’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지.
아가씨 : 우와~ 정말 영광이다. 그런 분을 만나다니...

 

대충 얘기는 이렇게 진행되었습니다.
술집에서 계산을 마치고 나가는데 그 아가씨가 따라나와

싸인을 해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멋적은 표정으로 곤란해 하는 나를 보며

그 후배는 계속 키득거리며 웃고 있었습니다.

 

 

 

 

4

작가라는 말은 아무에게나 붙여서는 안될 말 같습니다.
예전에 어느 통신사 게시판에서 ‘작가’라는 호칭을 가지고 격론을 벌인 기억이 나는데,
나는 ‘작가’라는 호칭에 대해 아무나 붙일 수 없는 호칭이라는 의견입니다.
호칭이 존귀해야 그 호칭을 들으려고 나름대로 노력을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귀한 것은 귀한대로 그 희귀성을 남겨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호칭을 듣고 싶으면 그 호칭에 걸맞는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겁니다.

 

어느덧 인터넷에 글을 쓴지도 3년이 넘었습니다. ‘작가’라는 호칭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그저 글을 잘 쓰고 싶은데

그야 말로 참으로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으니 언젠가는 좋은 글이 나오리라는 생각입니다.

 

 

요즘은 좋아진 남북관계 분위기에 어울려
‘국민작가’에서 ‘인민작가’로 호칭이 바뀌었습니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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