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끔찍하게도 여겨지는, 하기 싫은 해야 할 경우가 있다.
그런데 그것이 자신의 의사와는 다르게 하게 될 때는 포기상태에서 하게 되지만
순수한 자신의 의지로 해야 할 때는 참으로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군대는 그런 일들이 자주 일어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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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 말이면 모든 것들이 부족해진다.
비누도 떨어지고 담배도 떨어지고.
새달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만 그 시간은 참으로 길게만 느껴지곤 한다.
김병장은 화장실에 앉아 볼 일을 보다가 볼일이 다 끝나가고 있을 무렵
문득 손에 쥐고 있는 화장지가 턱없이 부족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는
지금이 월말이라는 사실을 새삼 떠올렸다.
지금 가지고 있는 화장지의 양으로는
마무리 작업(?)도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는
김병장은 큰 소리로 외쳤다.
“밖에 누구 없나?”
“예! 상병 아무갭니다!”
누군가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야! 너 나가서 화장지 좀 구해와라!”
김병장은 조금 염치 없는 부탁이라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일단은 이 상황을 벗어나고 보자는 생각에서 그렇게 명령조의 부탁을 했다.
“저… 김병장님…”
후배 사병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계속 말을 이어간다.
“오늘 목욕 있는 날인데요. 조금 있으면 목욕 집합이랍니다.
대충 마무리하고 나오셔도 될 것 같은데…….”
그런가? 오늘은 목욕하는 날이구나. 김병장은 속으로 다행이다 싶었다.
그 부대는 겨울철엔 여러 중대가 일주일에 한번씩 목욕탕을 돌아가며
사용하게 되어있었는데 김병장이 속한 중대가 오늘 목욕하는 날이었다.
‘그거 좋은 생각이다.
무식한 군바리 한테는 안어울리겠지만 이런 경우 댓쯔 굳 아이디어라고 하지.’
가지고 있는 화장지를 최대한 유효적절히 활용하여 마무리를 하고 나온 김병장.
상당히 께름직한 상태였지만 곧 목욕탕으로 간다는 사실에 애써 참고 있었다.
또한 뒤가 구린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도 몸소 알 것 같아
교육적으로도 충분한 위안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목욕탕 시설 수리 때문에 이번주 3중대 목욕은
내일로 연기되었다는 전갈이 왔다.
김병장은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고 입에 침을 튀어가며 흥분했지만
오히려 중대원들은 평소에 목욕도 안하던 놈이
오늘따라 설친다는 의미의 애매한 표정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후 2~3시간은 김병장에 있어서 너무도 찜찜하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다.
마무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도 느꼈고 더불어 한국 축구의 고질적인 문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점점 더 그것이 신경쓰여서
잠자리에 들기전까지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으며,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오직 목욕, 그것 뿐이었다.
드디어 취침시간이 왔다.
모두들 잠자리에 든 시각 김병장은 홀로 세면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 * *
여기서도 문제는 있었다. 밖의 기온은 무려 영하 20도가 넘는 강추위.
세면장 안이라고 해봐야 바람을 막아주는 정도.
김병장이 겨우 구한 뜨거운 물은 세수대야로 한 대야가 채 못되었으니
막상 목욕을 하는 것도 끔찍한 일이었다.
옷을 벗으니 찬바람이 살갖을 에인다. 날카로운 칼로 온몸을 찌르는 것만 같다.
얼지 않도록 조금씩 흐르게 한 수도꼭지밑으로 손을 넣으니
손이 잘려 나갈 것 만 같았다.
마지막 옷을 벗으면서 김병장은 팬티가 얼마나 따뜻한 옷인가를
팬티를 입기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물을 한번 묻히고는
괴성을 지르며 세면장을 두바퀴씩 뛰어다녀야만 겨우 살 것 같았다.
몸이 점점 굳어온다.
겨우 따뜻한 물을 손에 담가 몸을 조금 적셨지만 그때 뿐이고
점점 다가오는 강추위에 턱밑이 달달 떨리고만 있었다.
비누칠하고 두바퀴뛰고, 물뿌리고 또 두바퀴뛰고 …….
김병장이 뛸 때마다 항상 들리던 딸랑딸랑 소리도 이제는 들리지 않는다.
김병장은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보았다.
중요하고 은밀한 신체 부위가 이렇게 작아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얼마나 커지는가도 실험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그 와중에 잠깐 하고는
또 세면장을 두바퀴 뛰었다.
아~ 이건 생존이요, 발악이었으며 또한 사투였다.
* * *
목숨을 걸다시피 한 목욕은 끝났다.
정신이 맑아지긴 커녕 머리가 강한 힘으로 눌려있는 것처럼 조여온다.
어쩌면 찜찜한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잠자리에 든 김병장.
주변이 조금 소란스럽다. 벌써 보초근무 교대시간이 돌아온 모양이다.
늘 있는 일이니 그리 신경쓰지 않고 잠을 청하려는데 근무지에서 돌아온 사병이
불침번을 서고 있던 동기와 나누는 말소리가 김병장의 귀에 들려왔다.
“이봐! 이상병!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는데 뭐 먼저 들을래?”
“그야 물론 좋은 소식이지. 뭔데?”
“음… 좋은 소식은 오늘 목욕이 내일로 연기되었지”
“허~ 그거 잘 됐네. 오늘은 근무시간이어서 목욕을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럼 나쁜 소식은 뭐야?”
“음… 그건…….”
잠시 머뭇거리던 불침번의 사병은 묘한 웃을 띄며 말을 이어갔고
그말은 막 잠에 빠지려던 김병장의 귀에도 또렷히 들리고 말았다.
“중대장님이 군기가 빠졌다고 내일 아침부터 장교는 물론 전사병이
냉수마찰을 시작한다는군…….”
아하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