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병장 김병장의 군대이야기

펄럭이는 팬티

아하누가 2024. 6. 30. 01:15


 

군대라는 곳은 당연히 빨래도 스스로 해야 한다.
항상 숙소 앞에는 빨래를 말리는 커다란 장소가 있고 거기에는 항상
많은 빨래들이 펄럭이고 있다. 모두들 같은 모양을 한 옷들이다.
그러다보니 네옷 내옷을 가리기가 어려워 모든 옷에는 유성매직으로 커다랗게
자신의 이름들이 쓰여있다. 이름이 커다랗게 쓰여진 채 빨래줄에서 펄럭이는
팬티......
이것이야 말로 군대에서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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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여름의 열기가 남아 있는 어느 오후,
김병장은 무심코 빨래줄에 널려있는 옷들을 바라보다가 참으로
진기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국방색을 띈 옷에 쓰여진 검정색 매직 글씨야

눈에 잘 띄지 않으니 그렇다고 쳐도
흰색으로된 내의에 진한 검정색 이름은 아무리 생각해도 우스꽝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름을 저렇게 써놓은 것은 남의 것과 구분을 하기 위한 것일테고,
남의 것과 구분을 하려는 것은 잊어버리지 않게 하려는 것이고…….

그렇다면?
남의 팬티를 훔쳐 입는 놈도 있다는 얘긴가?

 

그런 생각을 하니 김병장은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서 빨리 내무반(군인들이 생활하는 숙소)으로 들어가서 없어진 팬티가 있는지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니 더더욱 웃음이 나오는 것이었다.
어제 오늘일도 아닌데 왜 그런 장면과 생각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는지
김병장은 그리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랜만에 빨래들을 쳐다보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김병장은 문득
이상한 팬티 한장을 발견했다.
 


                   *          *          *

 

 

 

식형

 

낯설은 이름이 커다랗게 쓰여진 팬티였다. ‘식형’이라는 이름이었는데
그 이름은 다른 사람의 이름보다 훨씬 굵은 글씨로

몇번을 겹쳐서 쓰여져 있었기 때문에 눈에 더 잘 띄었다.

하지만 같은 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에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몇번이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한사람 있긴 한데 그 사람의 이름은 ‘이형식’이었지 ‘식형’은 아니었던 것이다.

‘조금 특이하게 하려고 이름은 거꾸로 쓴 것일까?’

김병장은 그러려니 했다.
왜냐하면 팬티의 이름을 써넣는 것도 개성인지 나름대로
각기 다른 형태의 이름을 하는 것이다. 이것도 참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팬티에 이름 쓰면서도 개성을 표현하려는 사실이 말이다.

김병장은 한동안 가졌던 한가한 생각에 몹시도 만족하며 남은 저녁 일과를
준비하고 있었다.

 

 

 

                   *          *          *

 

 

 

하루 일과가 힘들게 끝나고 잠자리에 막 들려는데

입대 동기 한 녀석이 옆으로 다가와 자그마한 소리로 속삭인다.

 

 

“이병장이 화장실 뒤로 오래…….”

 

 

목소리가 잔뜩 풀이 죽은 걸 보니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또 무슨 꼬투리가 잡힌 모양이려니 하며 김병장은 떨어지는 않는 발걸음으로
화장실쪽으로 향했다. 이미 화장실 뒤편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고
한쪽에선 이미 얻어터지는 일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래?”

 

 

김병장은 옆자리에 서있던 동료 사병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몰라. 아직 뭔지 몰라. 또 누가 사고쳤겠지…….”

 

 

옆자리 동료는 이미 모든 상황을 포기했는지 그리 궁금하게 여기지도,
그리 알려고도 하지 않는 듯 했다. 하긴 알아봐야 별 해결책이 없는 것이지만.

 

집합시킨 고참은 계속 열띤 잔소리를 하기 시작한다.
군기가 빠졌다느니, 고참 알기를 뭐 같이 안다느니……. 하지만 이런 잔소리야
늘 듣는 얘기니까 그리 심각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고참의 잔소리중에
무언가 귓가를 예리하게 스치는 소리가 들리고 있음을 김병장은 느꼈다.
그 고참의 잔소리중에 이런 말이 있었던 것이다.

 

 

“이 눔의 시키들이 이제는 고참 팬티까지 훔쳐 입어?”

 

 

김병장은 생각했다.
정말로 남의 팬티를 훔쳐 입는 놈도 있다는 사실을.
그러다가 문득 오후에 빨래 말리는 곳에서의 생각과 광경이

오래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지나쳤다.

 

‘그렇지…….’

 

 

김병장은 왜 이 한밤중에 여기에 모여서 잔소리를 듣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잔소리를 하던 고참의 이름은 ‘이시영’이었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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