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조직에서는 무언가 적법하지 않은 일을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비양심적인 행동은
나름대로 합리화시키면서 누군가 그 행동을 하면 입에 침을 튀어가며
비난하고 나서기 마련이다.
특히 자신이 비양심적인 행동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그것을 바로 따라한다면
그 사람이 얼마나 얄밉게 보이는지…
비양심적인 행동이 잦은 사람들은 이 부분에 대해 잘 알것이다.
군대 또한 사람사는 집단이라 이 문제가 가끔 일어나곤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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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무슨 교육인지 집합인지 모두 연병장으로 모이라는 지시에
김병장은 심기가 편치 않았다.
더욱이 최근 들어 잠이 모자라서 그런지 아니면
영양보충이 시원찮아서 그런지 가끔 다리가 달달 떨려오면서
계단의 높이가 마치 등산로의 어설픈 흙계단 처럼 느껴지고 또한 몸에 힘이 없고
자꾸 졸음만 오는 것이 오뉴월의 병든 닭처럼 비실대는 것이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김병장은 혹시 빈혈이 아닌가? 하는
국방의 의무를 담당하는 군바리 답지 않은 불길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김병장은 아침에 집합한 이유를 알고 나서는
더욱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모두들 집합한 이유는 대한적십자라는 정체모를 집단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어 보이는 군바리 피를 뽑으러 온 것이었다.
김병장은 하늘이 노랗게 변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중대원 전원이 모여서 연병장을 향해 마치 도살장 가는 소처럼 끌려가
연병장에 도착하니
한대도 아니고 두대도 아닌 무려 5대의 헌혈차가 나란히 서서
우리나라에서 제일 값싸게 구입할 수 있는
군인들의 먹음직한 피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병장이 소속된 중대말고도 다른 중대원들까지 모두 나와 있어
연병장은 마치 보스니아전에 우리 군인들을 파병하는 장면과 비슷한
대규모 행사가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서 헌혈했다가는
분명 두다리가 꽈배기처럼 꼬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한 김병장은
일단 최후의 변수를 고려해서 가능한 가장 뒷쪽에 줄을 섰다.
빨리 하고 쉬겠다며 앞줄에 서겠다는 동료들이 갑자기 천사처럼 보였다.
어떻게든 이를 잘 피해야 할텐데 그리 만만치 않다.
장교들은 먼저 헌혈할테니까 헌혈하지 않고 도망가는 놈이 얄밉지 않을 리 없겠고,
그러니 도망가지 못하게 간첩잡는 노력보다 훨씬 공들여
모두 다 헌혈에 참여하도록 할게다.
그렇다고 같이 줄 서 있는 여러 고참들의 눈길이 있어 이 상황에서 도망은
거의 알카트레즈 감옥에서 나오는 것보다 50배는 더 어려울 것 같았다.
하지만 김병장은 최후까지 헌혈차와 이 삼엄한 경비를 뚫고 도망쳐야 한다는
한줄기 희망을 그 틈에도 버리지 않고 있었다.
뒤쪽에 서있는 보람일까?
앞에서부터 더디게 진행되던 헌혈 행사가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대기하고 있던 사병들이 생리현상의 해결을 위하여
자리를 합법적으로 이탈하는 광경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김병장은 생각했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기회는 없어진다고.
* * *
화장실에서 바지를 추스리며 마지막 단추를 채우며 비장의 결심을 굳힌 듯 김병장은
내무반과 내무반 사이에 있는 법당(불교 신자들의 종교행사를 위한 절)을 향해
머리속에 알고 있는 모든 불교용어를 외치면서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
평소에 불교라고는 중국 무술영화에서 가끔 볼 수 있었던 소림사밖에는 몰랐으나
이 순간만큼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던 직지심경이니 반야심경, 그리고
해인사나 송광사 같은 국내 이름있는 절도 생각났으며,
달마대사는 물론이요 사명대사와 그의 스승 서산대사까지 기억에 떠올랐고
특히 사명대사는 다른 말로 사명당이라고도 한다는 국사학적인 학습 경험도
기억해내게 되었다.
하지만 부처님도 무심하게 법당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평소에는 군번으로 문고리 부분에 걸치고
맥가이버처럼 별 것도 아닌 손돌림을 하면 쉽게 열리던 문이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이 순간은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조그마한 창문이 보였다.
저곳은 잠금 장치도 없는 창문이지만 높은 곳에 있는데다가 크기가 작아
사람 몸 하나 정도가 겨우 빠질만한 곳이었다.
김병장은 힘껏 뛰어올라 창문에 매달렸다.
장대도 없는 맨몸으로 뛰어오르는 것이었지만
장대높이의 대가며 세계신기록 제조기라는
우크라이나의 세르게이 부브카라는 선수도 놀랄만한 고난도 기술을 보이고 있었다.
소대장을 모시고 와서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건 미친 생각이라는 것 또한
빠르게 김병장의 두뇌를 강타하고 있었다.
그리고 몇번의 발버둥 끝에 몸을 창문 안쪽으로 들이는 것은 성공했으나
몸만 밀어 넣었지 내려갈 방법은 없었다.
창문의 크기가 어딘가를 잡고 뛰어 내리기에는 턱없이 작았다.
마지막 방법으로 김병장은 머리부터 떨어지기로 했다.
어떻게는 저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마치 중국선수들이
스프링보드 다이빙을 하는 것처럼,
또는 유도 선수의 낙법처럼 고난도의 기술을 보이며 안으로 떨어졌다.
쿵!
어깨부터 떨어진 모양이다.
법당 바닥에 누워서 김병장은 몸의 이곳저곳에 힘을 주어 보았다.
다행히 부러지거나 아픈 곳은 없었다.
잠시 김병장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이제는 살았다. 모든 것이 다 부처님의 자비다.
이제 여기서 조금만 버티다가
헌혈한 사람들이 안한 사람보다 어느덧 많아질 무렵,
자연스럽게 그 무리들에 합류하여
마치 헌혈을 이미 끝낸 사람처럼 행동하겠다는
뻔뻔스런 계획도 그 작은 틈에서 치밀하게 세우고 있었다.
그때였다.
‘앗!‘
눈을 겨우 뜨고 주위를 둘러본 김병장은 크게 놀랐다.
법당 구석에는 이미 5명의 중대원들이 불상이니 연등이니 각자 몸을 숨길만한
여러가지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몸을 숨기고 있다가 김병장이 들어오니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 놀랐던 것은 대부분이 고참 사병들이었던 것이다.
“이 시키가 나 하나 빠진 것도 불안해 죽겠는데 쫄따구까지 도망와?
너 오늘 죽어봐라…….”
헌혈을 피하려 들어온,
신성함이 넘쳐야 하는 법당안에서는 살생과 폭력을 하지말라는
불교 본래의 가르침은 이미 없어진지 오래고
또 다른 활극이 소림사를 배경으로 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벌어지고 있었다.
법당안에서 얻어터지면서 김병장은 생각했다.
부처님이라고 항상 자비로운 것은 아니라고.
또한 때로는 헌혈이 더 몸에 좋다는 말이 사실이라고.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차라리 팔 걷어부치고 나서서 일찍 헌혈한 다음
쫄따구 중에 도망가는 놈들을 반드시 수색 검거하여 모두 체포하고 말겠다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잠시 후 김병장은 곧 유쾌해졌다.
한참 정신없이 얻어맞고 있을 때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김병장이 떨어졌던 그곳에 떨어지고 있었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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