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병장 김병장의 군대이야기

찰나의 미학

아하누가 2024. 6. 30. 01:12


 

군대라는 집단은 참으로 특이한 사회다.
모이게 된 특수성이 그렇고 모인 목적이 또한 그러하며,
모여있는 사람들의 단순성이 또한 그렇다.
하지만 이 또한 사람들이 부대끼며 사는 사회인만큼 슬픔도 기쁨도,
눈물도 웃음도 여느 사회나 마찬가지로 공존하는 집단임을 이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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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두렁을 따라 아무 생각없이 발걸음을 옮기던 김병장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걸음을 멈추었다.

앞서 가던 입대 동기 한녀석이 걸음을 멈추었기 때문이다.
녀석은 앞에 보이는 장애물 같은 것을 뛰어 넘으려는지 몇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힘껏 달려나간다.

 

 

 

                   *          *          *

 

 

 

작업중에 있었던 일이다.
무슨 작업이 그렇게 많은지 오히려 훈련을 위해 총을 들고 있는 시간보다
작업하느라 삽을 들고 있는 시간이 더욱 많은 것이었다.
그날도 열심히 삽질(?)을 하고 있는데 한 고참이 부대 철조망을 넘어가면
과수원이 하나 있다며 김병장에게(당시는 쫄따구였다) 사과를 가져오라는
지저분한 일을 시켰다.
군대의 지시란 너무도 간단명료한 것이어서 그것이 사과를 훔쳐오라는 건지
얻어 오라는 건지, 아니면 만들어 오라는 건지에 대해선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아마 설명할 필요도 없을 뿐 아니라 방법을 묻기라도 하는 날이면
한대라도 더 맞을 뿐이다.

 

김병장은 같은 쫄따구 입장인 입대 동기 한 녀석과 철조망을 넘어
논둑길을 걷게 된 것이다.

앞선 녀석이 힘껏 몸을 날렸다.
장애물을 뛰어넘으려던 그 녀석의 생각과는 달리 장애물은
매우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그 장애물 너머엔 바람에 날린 흙먼지와 나뭇잎으로
가리워진 거름밭이라는 또 하나의 장애물이 있었던 것이다.
녀석은 거름밭에 무릎까지 푹 빠지며 떨어지고 말았다.

그것을 본 김병장은 잠시 눈앞이 깜깜했다.

왜냐 하면 그것을 보고 있던 순간
김병장의 몸은 이미 허공을 날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병장은 그 순간에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잠시 여기서 김병장이 그 순간에 생각한 것들을 정리해보자.

 

 

1.
몸은 이미 허공을 날고 있지만 어린시절에 자주 보던 만화의 한 장면처럼
여기서 몸의 방향을 틀어 다리를 원의 형태가 될 정도로 빨리 흔들면
아까의 자리로 되돌아갈 수 있다.

 

2.
지금의 이 상태에서 멀리 뛰기를 하는 칼 루이스처럼 몸을 힘차게 내저으면
조금 더 멀리 나갈 수 있으므로 거름밭을 벗어날 수 있다.

 

3.
거름밭에 발을 딛는 순간 내공의 힘을 이용하여 ‘능공허도’나‘답설무흔’같은
무협지에 등장하는 도술에 가까운 기술을 발휘하여 또 한번의 점프로 거름밭을 벗어난다.

 

4.
빨래할 일을 생각하니 귀찮아진다.

 

5.
잦은 횟수의 자위 행위는 정신 건강에 해롭다.

 


김병장은 그 찰나에 많은 방법을 찾아 보았지만
결국 그 또한 앞의 녀석이 그랬던 것과 똑같이 거름밭에 빠졌다.
앞 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면 김병장은 거름밭에 무릎까지 빠지면서

앞으로 넘어져 손까지 짚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김병장은 참으로 중요한 사실을 알았다.
인간이 찰나의 상황에서도 엄청나게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          *          *

 

 

외출이다. 1년에 한두번 있을까 말까한.
조그만 시내지만 그래도 군인이 아닌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는

울타리 속에 갇혀 살고 있는
김병장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기웃거리며

군에 오기전에 있었던 몇가지 일들을 기억해 내고는
혼자서 흐뭇해 한다.

 


그러다가 문득 거리의 한 걸인이 김병장의 눈에 띄었다.
보통 때 같으면 무심코 지나쳐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제복을 입고 있는
자신의 입장이 그대로 지나칠 수 없다는 강박관념으로 다가왔다.
주머니를 뒤적이다 백원짜리 동전 하나를

걸인의 돈바구니를 향해 - 무슨 돈을 그리
많이 벌려는지 그 걸인의 바구니는 엄청나게 컸다 - 멋진 투구폼으로 던지다가
문득 그것이 백원 짜리가 아니고 오백원 짜리였다는 사실이 생각났으며,
그 사실을 확인한 순간 동전은 이미 손으로부터 한뼘 정도를 벗어나고 있었다.

 

김병장은 순간 아찔했다.
군대에서의 오백원은 엄청나게 큰 돈이었기 때문이다.
동전이 손을 벗어나는 짧은 순간에 김병장은 또 많은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또 한번 그의 생각을 정리해본다.

 

 

1. 동전에 새 몇마리가 보인 것으로 보아 500원짜리임이 확실하다.

2. 이왕 저질러진 일, 폼이나 멋있게 잡으며 걸어가자.

3. 저 동전이 걸인의 바구니로 들어가지 않고 또로로록 굴러서
다시 내 발 밑으로 돌아오진 않을까?

4. 오늘 저녁 보초 근무가 몇시더라?


 

하지만 김병장의 작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동전은 정확히 걸인의 커다란 바구니에 들어갔으며

김병장은 쓰린 가슴을 좋은 일 한번 했다고 애써 자위하며
가던 길을 계속 걸어야 했다.

 

 

                   *          *          *

 

 

저녁이 되어 부대로 돌아온 김병장은 절친하게 지내던 몇 사람에게
밖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다가

거지에게 준 동전 이야기가 생각나 이를 말하고 나서
그중 고시 공부를 하던 한 후배 사병에게 그 동전의 소유에 대한

법적 해석을 물었다.
그 사병은 조금도 막힘없는 화술로 이를 설명했다.

 

 

“음… 그것은 동전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으로 그 소유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동전을 던진다는 것은 소유권을 타인에게 넘기겠다는 의사를 표현한 것이므로
그 동전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에 그 동전의 소유권은 거지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다만 공중에 떠있는 순간에 대한 소유권은 동전을 주려던 사람,

즉 김병장의 것이므로
동전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다시 잡았다면 그 소유권에 대한 분쟁에 있어서는
김병장이 유리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미 땅에 떨어지는 순간 이후에는 다시 돌려받을 수가 없게 됩니다.
물론 동전을 던지기전에 그 거지에게

‘나는 100원만 줄테야’라는 의사를 구두라도
표현했으면 400원을 거슬러 받을 수 있는 충분한 권리가 생깁니다만은…….’

 

 

웃으면서 듣긴 했지만 한편으론 얄미우리 만큼 정확한 듯한 법적 해석에
은근히 심술이 난 김병장은 괜한 질투심에 그 논리를 따지고 들어갔다.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 그것이 법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문제냐,
그런 판례가 있느냐는 등등의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면서.

 

김병장의 엄청난 기세에 쫄따구가 잠시 당황한 기색이 보이자
김병장은 더욱 신이 나서 더 큰 소리로 따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적용하고 있는 사례가 있으면 말해보라고…….
승리를 확신하는 듯 기세가 등등하던 김병장은
잠시 가만히 있던 그 후배 사병의 조심스러운 한마디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 쫄따구는 이렇게 말했다.

 

 

 

‘낙장불입’

 

 

 

 

 

 

 

 

아하누가

글쓴이는 1985년 군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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