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은 말없이 담배를 꺼내 물고는
주섬주섬 담배에 불을 붙여줄 도구를 찾기 시작했다.
보초 근무를 나가기전에 실시하는 근무자 군장검사 때문에
몸 속 깊숙한 곳에 숨겨 두었더니 잘 나오지 않는다.
겨우 찾아서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긴 담배 연기를 뿜어낸다.
연기가 걷히니 거기에는 보초 근무를 위해 같이 온, 갓 입대한 신참 하나가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부대에 처음 들어온 신참들은 첫 근무지에서 같이 나간 고참에게
한바탕 호된 기합을 받는 것이 이 부대의 오랜 전통이었고,
또한 그것은 보초 근무의 군기를 위해서도 약간은 필요한 것이어서
김병장 역시 신참 시절엔 땀을 뻘뻘 흘려가며 기합도 받고
얻어 터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어느덧 흐르는 물과 같은 시간은 이렇게 신참 사병 하나를
그 과정의 교육을 시켜야 하는 입장을 만들었으니 한편으론 참으로
감격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담배 하나를 다 태울 즈음 김병장은 약간의 고민에 빠졌다.
신참 시절,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했던 첫 근무의 고통에 대한 회상과 동시에
자신이 고참이 되었을 때는
신참을 이렇게 괴롭히지 않겠다는 그때의 굳은 결심이 생각났으며,
더불어 부대의 오랜 전통과 군기를 위해서 이 신참에게 첫 근무의 추억을
만들어 주어야 하는 의무감 사이의 상반된 갈등이
심하게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담배를 또 하나 물었다.
그리고는 스스로의 처지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남들은 두 여자를 놓고 누굴 사귈까 고민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냥 놀고 먹을까? 아니면 아버지가 물려준 사업을 할까? 하는
두가지로 갈등을 하기도 한다는데
어찌된 일인지 자신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쓸데없는 고민만 하게 되는가 하는 원망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김병장은 결심이 선듯 담배를 힘차게 부벼 끄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신참도 첫 근무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는지라
자리에서 일어나는 김병장의 행동만으로도 이미 다리를 후들거리며 떨고 있었다.
김병장은 결심했다.
부대의 전통도 중요하지만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을 괴롭힌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또한 잘못된 전통을 지키기 보다는 올바른 전통을 새로 시작하는 것이
더욱 더 현명하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괜찮다고 강경하게 버티는 신참을 억지로 옆에 앉히고 담배를 하나 피워 물렸다.
김병장은 최대한 다정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아직 긴장을 늦추진 않았지만 신참도 김병장의 의도를 느꼈는지
산속의 깊은 초소에는 제법 좋은 분위기가 만들어져 가고 있었다.
김병장은 다정한 목소리로 찬찬히 물었다.
“어차피 같은 군인의 입장이고 또 이렇게 둘이 있게 된 것도 인연이니
어디 이런저런 얘기나 해볼까? 근데……. 뭔 얘기가 좋을까?
그래, 군에 오기전에 사귀던 사람있으면 그 얘기나 한번 해봐…….”
잠시 당황하며 머뭇거리던 신참이 얘기를 꺼내기 시작한다.
“소양강 댐 근처에 놀러간 적이 있었어요… 아시죠? 춘천에 있는거요…….”
“소양강? 그럼, 알고도 남지…….”
김병장은 담배를 다시 하나 꺼내어 물며 생각했다. 소양강이라…….
가만히 하늘을 쳐다 보았다.
말을 꺼내 놓고 보니 아련한 추억 하나가 떠오른다.
* * *
김병장도 군에 오기전에 잘 알고 지내던 여자가 있었다.
물론 그도 대부분의 군인이 그랬던 것처럼
첫 휴가 때 고무신을 꺼꾸로 신켜준 입장이 되었지만.
춘천에 있는 소양강에 놀러갔던 일이 떠올랐다.
춘천의 소양강 댐이 있는 곳에 가면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청평사라는 곳이 있다.
경치도 좋고 배타고 들어가는 운치도 있고 해서 데이트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곳에 들어가고 나오는 배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정해져 있는 그런 곳이었다.
오후 6시던가 6시 30분이던가, 청평사에서 나오는 마지막 배 시간을 놓치면
그곳에서 나올 방법이 없어 하룻밤을 지새야 하는 그런 곳이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던 김병장은 시간을 최대한 지연시키는
지연 작전을 구사했지만
선착장에서 배 시간에 대한 안내문을 확인한 당시 여자의 철저한 준비성 때문에
김병장은 개망신에 가까운 쪽팔림과
얼마 안남은 인격만 까먹고 말았던 일이 있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귀언저리살이 바르르 떨리는 쑥스러운 기억이기도 했다.
신병은 찬찬히 얘기를 이어 갔다.
“소양강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는 청평사라는 곳이 있대요.
그녀가 자꾸 거길 가자더군요. 그래서 가보니 그곳은 마지막 배를 놓치면
못나오는 곳이지 않겠어요?
그런데 그녀는 자꾸 폭포까지 올라갔다 오자는 거예요.
제가 대충 시간 계산을 해보니까 거기 갔다오면
마지막 배를 꼭 놓칠 것만 같더라구요…….”
신병은 얘기에 좀 흥분했는지 담배 한개 더 피울 수 없냐고 묻는다.
담배 하나를 건네준 김병장이 흥미있는 말투로 물었다.
“그래서……?”
신병은 덤덤한 표정으로 얘기를 이어갔다.
“그래서 제가 그녀에게 얘기했죠.
아까 선착장 안내문을 보니까 마지막 배를 놓치면
우린 못간다구요. 그랬더니 그녀는 나를 한참이나 쳐다보더니
눈물을 글썽이며 말하는 거예요”
“뭐라구……. 그러던가?”
김병장이 한걸음 바싹 다가 앉으며 물었다.
“으음~ 그러더니 저보고 ‘이런…… 바… 보’하더니
선착장으로 막 뛰어가는 게 아니겠어요?……”
거기까지 얘기를 듣고 난 김병장은 갑자기 심한 현기증과 함께 열이나기 시작했다.
열이 난다기 보다는 열을 받았다가 더 적당한 표현일까?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흥분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신참이 떨리는 목소리로 왜그러냐고 물으며
상황을 파악하려 했지만
분을 이기지 못한 김병장은 이미 신참을 패기 시작했다.
마치 개패듯이.
그러면서도 여자에 대한 자신의 쑥스러운 기억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 창피했는지 잔머리까지 굴렸다.
“아니, 이 시키가 고참이 초소에서 담배핀다구 지두 피워?
어디 죽어봐랏! 이얏! 퍽! 퍽!!!!!”
.
.
.
.
신참을 쥐어패면서 김병장은 생각을 다시 했다.
역시 전통이란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져야 한다고.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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