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병장 김병장의 군대이야기

화장실의 낙서

아하누가 2024. 5. 6. 21:33


 

 

금으로부터 10년전, 조국을 지키던 한 군인이 있었다.
이름하여 육군병장 김병장 -
그는 때론 호국의 간성으로 미화되기도 때론 군바리라는 속어로 비화되기도 했다.
이 이야기들은 그가 실제로 겪은 군대 생활을 꾸밈없이 그리고 있다.
그가 걸어온 군인 정신을 더듬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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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의 낙서

 

육군병장 김병장은 평소에 화장실에 대한 남다른 개념이 있었다.
바로 화장실이 사용자를 만족시켜 주어야 하는 기본 조건의 개념을
남몰래 정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화장실이 사용자를 위해 갖추고 있어야 할 것이란 화장지와 적당한 불결,
그리고 낙서인 것이라 늘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병장은 군대 화장실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화장지가 있을 리 없었고 지나친 불결은 장기 체류를 불가능하게 했다.
더욱 섭섭했던 것은 낙서마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화장실이 가지는 순기능만으로의 생활이 익숙해져 가던 어느 날.
군에 오기전 애용하던 모 지하철역의 화장실을 떠올리며

제대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던
육군병장 김병장은 드디어 감격적인 낙서와의 만남을 이루게 된다.

 

 

                   *          *          *

 

 

그날은 날씨가 개운치 않았다.
날만 개운치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맘도 편치 않았다.
아침부터 대X 적십자사에서 - 실명을 밝히면 명예훼손 소송에 말려들 수 있다 -
군인들 피를 뽑으러 차를 몰고 왔기 때문이다. 그것도 엄청 큰 차…….
헌혈을 마치 죽는 일로 알고 있던 김병장은 버스 용적 만큼 피를 뽑는 줄 알고
질식사를 각오한 채 장기체류를 위한 화장실행을 택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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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이기지 못하고 어떻게 남을 이긴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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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 자주 이용하던 3번째 화장실에 무심코 쭈그리고 앉는 순간

너무도 오랜만에 낙서를 발견하고는 잠시 흥분했지만

곧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었다.
외롭게 남긴 한 줄의 낙서이긴 했지만 어째 낙서 같지가 않았다.
김병장은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알고 있던 낙서란 주로 ‘사무실에서 그녀는 야근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흐흐흐…’ 이런 식의 호기심 유발형이나
또는 ‘누구 누구는 누구하고 얼레리…….’ 식의 무근거 고발형의 문장만을
낙서라 칭해 왔는데

이번 낙서는 낙서라고 하기엔 너무도 간결하고 그 내용 또한
군바리의 수준이라고 믿어지기 어려운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복잡한 머리를 뒤로 한 채 화장실을 나서는 김병장.
그나마 낙서를 보는 즐거움을 느꼈다는 뿌듯함과 아울러

X한 적십자의 헌혈차를 무사히 피했다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곧 군바리 특유의 단순함으로 돌아갔다.

 

 

                   *          *          *

 

 

날씨가 조금 좋아진 그 다음날....
화장실 3번째칸을 다시 찾은 김병장은 어제의 낙서 밑에

또 한줄의 낙서를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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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이기는 것도 나요, 남에게 지는 것도 나인데 
내가 어떻게 나를 이긴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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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장은 더욱 심각해졌다.
지금의 이 사태를 누구한테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낙서는 점점 심오해지고

낙서에 대한 평소의 개념은 여지없이 깨져가고 있으며,
더욱이 이런 일은 거의 제 정신이라고 보기 어려운

군바리들과는 상의도 할 수 없는 희대의 사건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김병장은 이 또한 군바리 특유의 단순함으로 극복하고 있었다.

 

‘군바리들의 지적 수준을 무시한 것은 나의 잘못이다.
그리고 낙서에 대한 평소의 개념 또한 잘못된 것이다.

비록 무식한 군바리지만
철학적 사고가 남달리 뛰어날 수 있으며 비록 화장실이지만
그 사고는 유지될 수 있으며,

비록 낙서지만 사상과 철학의 표현은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리고 나서 김병장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뿐만 아니라 내일 아침엔 또 한 건의 철학적 사고가

자신을 즐겁게 해줄 것이라는 기대감마저 갖게 되었다.
그날 저녁 김병장은 흥분과 기대로 잠을 못이루게 된다.
고등학교 시절의 수학여행 전날과

대학 시절 성적표가 도착하기 전 날 이후로
김병장은 잠이 들지 못한 채 아침을 맞게 된다.

 

 

                   *          *          *

 

 

아침이다.
예상했던 대로 화장실의 낙서는 있어야 할 곳에 있었지만

김병장의 정신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세번째 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길다란 화살표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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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 이 씨X놈들아 ! 지랄말고 똥이나 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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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육군병장 김병장은 심한 정신 착란 증세로

분대장의 보호를 받게 된다.
세월이 흘러 예비군 김병장과 민방위대원 김병장을 거치면서도
화장실만 가면 극도의 혼란으로

화장실의 순기능을 가끔씩 잊는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10년전, 조국을 지키던 한 군인이 있었다.

 


 

 

 

 

 

 

아하누가

아마도 이 글이 하이텔에 처음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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