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부여행에서는 정말 좋은 친구를 만났다.
택시기사 크리스(남. CHRIS)가 주인공이다.
우연히 택시를 타면서 알게 된 크리스는 성격도 좋고 성실하다.
나이도 비슷해서 금방 친한 친구가 되었는데, 여행 내내 이 친구 덕을 봤다.
아마 여태껏 필리핀을 가면서 현지인의 도움을 이렇게도 톡톡히 받아본 건 이 때가 처음이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호텔로 좀 와줘!~"
아침에 식사를 하다 택시기사 크리스에게 전화했다.
손님 모시고 공항가는 길이라며 잠깐 기다리란다.
얼마 후 호텔로 나타난 크리스는 항상 그렇듯 웃는 얼굴이다.
간밤에 뭐했냐니까 빨래하느라 바빴다고 한다.
그러니까 장가를 가야 한다니까 크리스는 또 그 소리냐며 손사레를 친다.
많은 나이인데도 미혼이다.
단지 먹고 사는 게 힘들어서 결혼을 못한다고 한다.
아무래도 이 친구 장가갈 생각이 아예 없거나
혹은 뭔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싶다.
"크리스,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보다 남자가 더 좋지?"
무슨 말인지 잠시 어리둥절하던 크리스, 반색한 얼굴로 펄쩍 뛴다.
그러더니 줄줄이 나오는 지난 여자친구 이야기.
장가 못간 것도 서러운데 뜬끔없는 오해를 받았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싱거운 소리 그만하고...... 오늘은 어디 갈 거야?"
운전대를 잡고 출발하고 있는 크리스는 매우 성실한 친구다.
택시는 렌트한 것으로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만 일을 한다.
밤 시간은 아예 안하고 집에서 푹 쉰다고 한다.
그래야 다음 날 일에 지장이 없다나?
"내일 보홀섬에 들어갈 예정인데 혹시 피어 원(Pier 1) 알아?"
"내가 택시 기산데 모를 리가 있나."
"일단 거기 가서 배 시간 좀 알아보자구. 혹시 근처에 유명 관광지 없을까?"
"근처에 산 페드로 요새 있어. 갈 거야?"
크리스와 도착한 곳은 산페드로 요새(Fort San Pedro).
마닐라에 산티아고 요새가 있다면 세부에는 산 페드로 요새가 있다.
두 군데 모두 생김새가 비슷하고 목적도 비슷하며 또한 비슷한 내력을 안고 있다.
스페인 통치 시대였던 1783년 이슬람 해적 등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이후 스페인 통치 말기에 해당하는 1898년에는
세부의 독립 운동 세력에 의해 점령되었고,
미국의 식민지 시대에는 군막사로, 일본 식민지 시대에는 포로 수용소로 쓰였다.
사실 여행에 있어 유명관광지를 둘러보는 것은 단지 눈도장 찍는 것에 불과하다.
그 나라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도 나쁠 거야 없지만
여행에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느껴지는 국민적 문화와 감성의 차이,
그리고 그때쯤 되면 그런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는 그들의 역사가 비로소 느껴진다.
역사관과 문화가 유적지를 보면서 느껴지는 것만은 아니다.
이후 크리스와 함께 세부 시내의 유명한 관광지 몇 군데를 둘러보았다.
상업중심지인 콜론 스트리트,
1521년 탐험가 마젤란이 만들었다는 마젤란 십자가가 있는 팔각정,
시내 유일한 도교사원 등이다.
몇 군데 가봤지만 그냥 겉보기 둘러보기식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보고 그냥 지나칠 수도 없는 곳이다.
이 상황은 여행에 있어 가장 많은 딜레마를 느끼게 하는 상황이다.
그다지 원치 않지만, 파리에 가면 에펠탑을 보긴 봐야 할 것인 것처럼.
결국 눈도장 찍듯 몇 군데를 훑어보니 어느새 저녁 나절이다.
"크리스, 혹시 요즘 피에스타 하는 동네 알아?"
"글쎄......"
피에스타(Fiesta)는 축제라는 말로, 스페인어의 영향을 받은 단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필리핀의 독특한 문화이기도 하다.
아마 필리핀이라는 나라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알아야 할
중요한 단어 중 한가지일 것이다.
그전부터 현장에 있고 싶었다.
사진도 찍고 싶었고 조금 더 일상 깊숙히 들어가보고 싶었다.
자연스러운 그 기회가 바로 바랑가이 단위의 작은 피에스타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사는 동네 뭐 준비하는 것 같던데, 가볼까?"
그거 좋은 생각이다.
내가 지금 보고 싶은 것은 관광객을 위한 그림엽서에 나오는 장소가 아니라
어쩌면 그런 모습일 것이다.
크리스와 택시를 타고 크리스가 사는 동네에 갔다.
필리핀의 어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피에스타를 하는 곳이면
골목마다 작은 깃발로 장식이 되어 있다.
아마도 우리가 어린 시절 초등학교 운동회 때 볼 수 있었던
만국기와 같은 형식이다.
자신이 사는 동네에 도착해서 여기저기 알아보던 크리스.
지난주에 큰 행사가 있었고 이번 주는 별거 없다며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
그냥 밤에 디스코파티 정도라나. 그것도 늦은 밤에나 시작할 것 같다고 한다.
그래도 그게 어디냐 싶어 저녁에 다시 찾겠다고 약속하곤
지역 이름을 꼼꼼히 적어두었다. 낯선 지명을 만날 때는 반드시 적어야 한다.
피에스타가 이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일 듯싶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는 조용히 피에스타 시간을 기다린다.
어떤 문화적 차이를 내가 느낄 수 있을지 작은 기대를 안고.
2006년
필리핀 세부에서.
사진촬영 PENTAX ist-DS
산 페드로 요새.
마닐라의 관광명소 산티아고 요새와 느낌이 거의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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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관광을 한 그날 밤,
저녁식사를 마치고 크리스가 살고 있는 작은 동네를 찾았다.
나 좀 태우러 오라니까 자기 영업시간 끝났다고 택시타고 오란다.
도착한 마을 공터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가로등도 어둡고 길도 좁은, 전형적인 서민들의 거주지역이다.
좁은 길은 이미 바리케이트로 차량을 통제했고
작은 골목엔 요란한 음악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골목길 중에서 가장 넓은 곳에 스피커가 잔뜩 쌓여있고
신나는 댄스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전봇대와 전봇대 사이를 굵은 밧줄로 이었고 그 가운데 조명을 매달았다.
그 조명은 우리가 흔히 노래방에 가면 볼 수 있는 것이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동네 사람들은 모두 나와 있는 듯했고
여기저기 춤추는 사람들의 무리가 보인다.
피에스타도 규모별로 다른데, 이 정도면 동네잔치 수준이다.
춤출 사람은 춤추고 아줌마들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구석에 자리잡고 앉아 이야기에 정신이 없고,
남자들은 한켠에 맥주와 발룻(반쯤 부화된 오리 알을 삶은 것)을 즐기고 있다.
디스코 파티라고 하지만 일정한 식순도 없고 행사도 없으며
경연대회 같은 이벤트도 없다.
그저 음악이 밤새 흘러나오고 그 음악에 맞춰 춤을 추든 말든
한 여름밤을 즐겁게 보내는 중이다.
이게 무슨 축제나 되는지, 뭔가 거창하지 않으면 볼거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전형적인 한국사람인 내 눈엔 상당히 황당한 현상이다.
잠시후 나타난 크리스는 동네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시켜주었다.
우리와 다른 이들의 사고방식 중 한 가지는,
외국인 친구가 있다는 것을 상당히 자랑스러워 한다는 사실이다.
분위기가 분위기여서 그런지 모두들 반겨준다.
많은 사람과 인사했고, 외국인을 보기 힘든 아이들하고도 놀아줬다.
잠깐이었지만 카메라를 가져오지 않은 사실을 후회했다.
주로 밤에 돌아다닐 때는 안전문제도 있고 무게 또한 부담스럽기 때문에
해진 이후엔 카메라를 들고 다니지 않는다.
그러나 그 마음은 잠시였고,
카메라를 가져오지 않았음이 오히려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할 때, 낯선 마을을 방문할 때도 그 타이밍이 중요하다.
혼자 기웃거리며 사람 사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고
이곳저곳에 셔터를 누르는 것을 좋아할 주민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진을 찍는 것도 소양이 있어야 한다.
자신만의 사진을 담고 싶다는 욕심에서 원치않는 장면을 촬영한다면
사진을 찍히는 사람들에겐 엄청난 실례요,
또한 그 역시 생명이 없는 사진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내셔널지오그라피의 어느 사진작가의 말이 다시 생각났다.
사진 찍을 대상물과 친해진 다음 셔터를 누르라는.
축제 같지도 않은, 적어도 내 눈에 동네잔치 같은 행사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뜨내기 여행자인 내게 이 피에스타가 주는 의미를 이해하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여행에 있어 찾기 힘든 이런 기회를 만들어준 크리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이 친구 그 이후로도 몇 번 더 이런 기회를 제공했다.
처음 경험하는 많은 일들을 이친구가 만들어줬다.
내게는 크리스가 가장 큰 도움을 받은 필리피노다.
아직도 택시운전하는지 모르겠다.
지금쯤 마간다 바바에 마누라 얻어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길 바라고 있을 뿐이다.
마젤란 십자가가 보관되어 있는 팔각정.
안으로 들어가면 마젤란의 십자가를 볼 수 있다.
누구나 볼 수 있게 항상 열려있다.
시내에 달랑 팔각정 하나 세워져 있는데 많은 관광객이 찾다보니 상인들도 많다.
어쩌면 상인들 구경하는 것이 관광지에서 볼 수 있는 더 재밌는 볼거리인지도 모르겠다.
세부 시내의 도교사원.
필리핀에서 만나는 중국풍의 건물은 그 느낌이 특별하다.
같은 동남아권인 태국, 베트남, 싱가폴에 비해 중국의 느낌을 받기 힘든 곳이 필리핀인데,
그래도 곳곳에 중국문화의 흔적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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