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속에서 또 다른 여행을 떠나다

세부여행기-싸붕

아하누가 2024. 6. 30. 00:34

 


이왕 시작했으니 이 기회를 빌어 구석구석 필리핀 문화를 살펴보자.

다른 문화를 엿보는 것은 흥미로울 경우도 있다.

세부여행에서 만난 싸붕.

좋은 인상과 추억을 남겨준, 필리핀에서 받은 소중한 선물이다.

 

 


필리핀이 가진 독특한 문화 중에 닭싸움이 있다.

어렸을 때 우리가 한쪽 다리를 들고

껑충껑충 뛰며 상대를 쓰러트리는 그 닭싸움이 아니라,

진짜 닭 두 마리가 서로 죽기살기로 싸우는 그 닭싸움이다.

필리핀 말로 싸붕이라고 하는데 동남아 일대 몇 개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문화다.

특히 그중에서도 필리핀의 닭싸움은 매우 유명해서 닭싸움만 하는 경기장도 있다.

매주 일요일이면 곳곳에서 벌어지며 축제기간에는 큰 길거리를 막아

꽤 규모가 큰 대회가 열린다고 한다.

 

 

운 좋게 내가 찾은 곳은 간밤에 디스코 파티를 하던 바로 그곳,

택시기사 크리스네 동네다.

이 친구 좀 친해졌다고 다양한 도움을 받는다.

닭싸움이 열린다고 해서 커다란 장소에서 거창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동네 어귀의 한 모퉁이를 막아 특설링(?)을 설치하고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구경하는 형식이다.

하지만 이것 또한 이들에게는 훌륭한 문화요 또한 레저생활이다.

 

 

우선 경기장 구석에 행사위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 조직위원회쯤 될 것이고 행사 전반의 진행과 운영을 맡을 것이다.

그리고 심판이 있고 베팅을 담당하는 사람이 있다.

이 닭싸움에는 베팅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극적인 효과를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싸움을 할 닭 두 마리가 주인과 함께 입장한다.

주인들은 닭을 안고 조직위원회와 심판에게 닭을 선보인다.

아마도 규정에 따른, 일종의 신체검사 같은 것일 게다.

심판이 두 마리의 닭을 점검하는 동안 베팅 요원은 요란한 몸동작으로

둘러선 구경꾼들에게 베팅을 접수받는다.

이 대목이 아주 흥미롭다.

 

 

베팅이라고 해서 베팅용지에 원하는 닭과 금액을 적는 방식이 아니라

단지 손가락 또는 말로 액수를 정하면 베팅요원이 이를 기억하고

경기 후 이긴 사람에게는 베팅 상금을,

진 사람에게는 아까 제시한 액수의 돈을 걷어가는 방식이다.

100퍼센트 수동인데, 이것이 베팅의 전부다.

물론 이긴 사람에게도 조직위원회 커미션과 닭주인에게 돌아간 상금을 제외하고

비율대로 분배한다. 당연히 세금은 없다.

 

 

사람들로 빙 둘러쌓인 닭싸움장 한 구석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베팅을 담당하던 진행요원이 나를 발견했다.

 

 

"어이, 외국 친구! 이리 가까이 오지?"

 

 

애써 자리잡은 사람들을 닭 쫓아내듯 몰아내고

내가 서있을 만한 자리를 만들어준다.

이거 참 민망하다. 아무리 이곳에선 보기 드문 외국인이라고 해도

일찍부터 와서 자리잡은 현지인들에게 미안한 일이다.

그런데도 워낙 낙천적인 필리핀 사람들은 자리를 만들어주고 환영해준다.

베팅요원이 필리핀 사람 특유의 넉살좋은 표정으로 물었다.

 

 

"베팅해야지? 한 400페소 어때?"

 

 

400페소면 당시 한국 돈으로 약 8,000원이다. 지금은 10,000원쯤 한다.

손가락 네 개를 옆으로 누인 동작으로 내게 베팅을 유도하고 있다.

대충 훑어보니 대부분 100페소 베팅 하던데 나만 외국인이라고

나름대로 세게 부른 모양이다.

 

이럴 때 긴장하거나 당황해서 부끄러워하거나

어리바리 행동하면 국가이미지를 훼손하게 된다.

사람들은 내 생김새로 보아 한국인임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럴 때는 일단 침착하고, 되도록이면 당당하고 의연하게 행동해야 한다.

 

 

"가만히 있어봐!!! 나도 닭 좀 봐야지!"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진행요원은

닭은 안고 있던 주인 두 사람을 나를 향해 돌려세웠다.

마치 사람끼리 혈전을 벌일 것 같이 긴장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정말로 황당한 표정으로, 그리고 얼떨결에 내 앞에서 포즈를 취해준다.

그들도 황당했지만 나도 황당했다.

보기 드문 외국인이라고 대접을 해주는 모양이다.

일단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주변에서는 여전히 내 행동 하나하나를 주의깊게 쳐다보고 있다.

마치 동물원 원숭이 마냥.

상황이 이럴수록 조금 더 침착해야 한다.

이미 분위기는 노는 분위기니 신변의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혹시 모를 민망한 행동으로 국가 이미지 훼손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저쪽에 200페소. 오케?"

"확실히 말해. 어느 쪽?"

"내가 보기에 오른쪽. 그러니까 단색 말고 칼라풀 한 놈으로!"

 

 

내 말이 끝나자 내 주변, 특히 왼쪽에 자리잡고 있던 구경꾼들 사이에

엄청난 환호가 튀어나왔다. 그 닭에 베팅한 사람들이다.

정말 소름이 오싹 돋을 환호성이었고, 늠름한 척 당당한 자세로 있었지만

주변 상황은 정말이지 정신없고 혼란스럽고 긴장되고 있었다.

그들 중 몇 사람이 내게 다가와 흥분한 표정으로 설명하기 시작한다.

 

 

"너 정말 닭 잘 골랐어."

"저 놈 무지 센 놈이야."

"분명히 이길 거야. 그치?"

 

 

나야 돈 걸었으니 당연히 이겨야 하지 않겠나?

 

 

 

경기가 시작되었다.

심판의 시작신호와 함께 구경꾼들 사이에서 터지는 환호와 응원열기는

상당히 과격하고 또 열광적이다.

마치 한국과 일본이 축구시합을 할 때 시작 휘슬이 올리는 시점과

분위기는 별반 차이가 없다. 대단한 열기다. 광적이다.

이런 현장에 내가 있다는 것은 여행자로서 상당한 행운이다.

필리핀뿐만 아니라 이곳저곳 많이 다녔지만 이런 기회는 거의 찾기 힘들다.

 

 

이 닭싸움은 잔인하게도 둘 중에 한 마리가 죽을 때까지 한다.

한 마리가 쓰러지면 심판은 두 마리를 동시에 마주본 채 치켜든다.

그리고 쓰러졌던 닭이 고개를 들면

아직 싸울 의사가 있다는 것으로 판단하고 다시 경기를 재개시킨다.

하지만 한번 충격을 받은 닭이 전세를 역전시키는 경우는 드물다.

내가 베팅한 닭은 초반엔 제법 선전하는 것 같더니

이내 꼬꾸라져서 힘을 쓰지 못했다.

결국 1분 남짓한 시간에 승부는 끝나고 말았다. 200페소 날아갔다.

경기가 끝나니 넉살좋은 웃음을 짓던 진행요원이 내 앞에 다가왔다.

똑같은 표정으로 손을 내민다.

 

 

"200페소 내야지?"

"알았다니깐!!!"

 

 

주머니를 뒤적거리다 빈손만 꺼내어 돈 내는 시늉을 하니

주변 사람들도 한껏 웃는다.

필리핀 여행을 할 때 이런 쇼맨쉽은 상당히 중요하다.

낙천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친근감 있게 행동해야 하고

그러기에 농담이나 쇼맨쉽은 매우 중요한 방법이다.

200페소 줬다.

 

 

"또 할 거야?"

"당연하지. 언제 하는데?"

 

 

닭싸움은 계속 이어진다.

경기가 열리는 중에도 계속 선수들이 주변에서 몸을 풀고 있다.

발가락에 걸린 날카롭고 긴 칼날이 인상적이다.

싸움에 진, 결국 죽어버린 닭은 안고 주인은 퇴장한다. 저 닭은 어찌되나?

 

 

"어찌 되긴, 잡아 먹는 거지."

 

 

집에 갔다 온다며 한참 후에 돌아온 크리스의 대답이다.

이 녀석 나름 농담도 제법이다.

나중에 관계자에게 들은 얘기로는, 싸움을 위해 키워진 닭은

항생제를 하도 많이 투여해서 요리로 먹을 수가 없다고 한다.

아마 그 닭을 먹으면 마이신 500알 정도 먹은 효과가 나타날 지도 모른다.

 

 

어쩌면 별 것 아닌 것 같은 이 닭싸움 구경은

내가 외국을 다니면서 겪었던 많은 장면 중에서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만큼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현장의 생생함을 그대로 느낀 경험이었다.

잔인한 면도 있는 싸붕이지만 이것 또한 이들의 레저이면서 하나의 문화다.

 

 

레저생활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인간이 가진 본성적인 잔인함을 해소할만한

그 무엇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

닭싸움은 이러한 두 가지 문제를 해소시켜주는

필리핀 남자들의 중요한 레저문화일 것이다.

 

 

 

 

필리핀 세부섬 바랑가이 보드로모에서.

촬영카메라 PENTAX ist-DS & 77mm F1:1.8 limited, 16-45mm F4

 

  

 

 

지역마다 행사마다 싸붕이 열리는 장소는 각각 다르다.

내가 갔던 지역은 작은 주택가 골목에 울타리를 치고 경기가 열렸다.

 

 

 



 

경기 시작 직전. 수탉만 싸움닭이 된다.

 

 

 



 

사람들은 무언가 큰소리로 외친다.

축구장에서 붉은악마들이 외치는 응원소리와 그 느낌이 흡사하다.

 

 

 



 

경기 시작. 사람들이 관심있게 쳐다보고 있다.

 

 

 



 

어느새 승부가 기우는 듯싶다.

 

 

 



 

심판의 역할을 중요하다.

한 닭이 기력을 잃었어도 두마리의 싸울 의사를 계속 확인한다.

고개를 든 이상 더 싸울 기력이 없어도 경기는 계속된다.

이때 구경꾼들, 특히 우세한 닭에 베팅한 구경꾼들은 경기를 중단시키라고 고함을 지른다.

 

 

 



 

승부가 났다. 이 녀석은 아쉽게 여기서 생을 마감했다.

 

 

 



 



 

닭발에 장착된 날카로운 무기. 

 

 

 

 



 

또 다른 선수(?)가 다음 경기를 준비하고 있다.

 

 

 

 

 

 

세부섬 바랑가이 보드로모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