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속에서 또 다른 여행을 떠나다

세부여행기-시골 마을의 로나

아하누가 2024. 6. 30. 00:38


 

세부여행기는 내용이 더 있지만 다음 글을 위해 이 글로 마무리해야겠다.

전체적인 세부의 느낌은 마닐라 보다 조금 더 여유롭고 따뜻하다.

사람들도 친절하고 좋은 느낌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곧 방문할 것만 같은 기분이다.

이 글 끝까지 읽으신 분들 축복이 있을 것이다.

 

 

 

 

 

크리스가 운전하는 택시는 어느덧 모알보알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중간 중간 볼거리만 있다 싶으면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느라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물이 맑고 해변이 아름다워 다이버들에게 인기가 있다는 모알보알.

하지만 나름대로 넓은 지역에서 아름답다는 그 바다를 찾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모알보알이라는 지역에 도착했다고 바다가 나오진 않는다.

일단 바다를 찾고 그 중에서도 좋은 해변을 찾아야 한다.

 

 

"왜? 바다가 안 나타나?"

 

이리저리 헤매는 택시기사 크리스에게 물으니

크리스는 나보다 더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난들 처음 오는 곳인데 어찌 알겠냐!"

 

 

하긴 그렇다.

세부에서 이곳 모알보알은 한국으로 치면

서울에서 제주도나 부산쯤 되는 체감거리인데,

서울 사는 나 역시 외국인 데리고 부산에 가면 자신 있게 앞장서서

멋진 바다를 안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보던가!"

 

퉁명거리며 제안하니 크리스는 인적이 드문 시골길에서 사람을 찾고 있다.

마침 뒷모습이 매우 튼튼하게 생긴 시골처녀가 걸어가고 있다.

 

 

 

 

 

"얼른 차 세워!"

"왜?"

"왜긴. 길 물어야지!"

 

 

인적이 드문 시골이어서 사람 찾기도 힘든데

시골에서는 보기 힘든 연령대의 처녀가 지나가는데

차를 안세우면 어쩌란 말이냐.

 

차를 세운 크리스는 지나가던 그 시골처녀에게 길을 물어봤다.

필리핀 사람들의 놀라운 특징 중 하나는,

어쩌면 그리도 낯선 사람끼리 친하게 얘기하는 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얼굴만 안지 1분만 지나면 모두 친구고 짖꿎은 장난도 서슴지 않는다.

크리스와 이 시골처녀도

마치 예전부터 알던 사이인양 친하게 대화를 주고 받고 있다.

길 묻는 대화가 끝나고 크리스는 다시 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어딘지 알았어?"

"응. 알 것 같아."

"가만, 차 좀 세워봐."

"또 뭐 할려고?"

 

 

크리스가 차를 세우자 나는 창문을 열어 친절한 시골처녀에게 고맙다는 말을

필리핀 말로 전했다.

 

 

"말라밍 살라맛!~~"

 

 

그리고 창밖으로 고개를 더 내밀고 물었다.

 

 

"아가씨. 여기 택시기사 아직 결혼 안한 총각이거든요...."

 

 

부끄러움 잘 타고 낯 가리는 크리스는 얼른 속도를 내어 출발했다.

아직 끝나지 않은 내말은 바닷가 시골마을에서 메아리처럼 울려퍼지고 있었다.

 

하지만 크리스는 시골처녀가 가르쳐준 바다를 여전히 찾지 못하고 있었다.

가르쳐준대로 가는 듯했지만 낯선 이방인이 찾기란 쉬운 곳이 아닌듯

바다는 금방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그 주변을 빙빙 돌다 마침 그 시골처녀가 다시 지나가는 것을 발견했다.

 

 

"차 세워!"

"이번엔 또 뭐하게?"

 

 

크리스는 긴장된 표정으로 물었다.

 

 

"저 아가씨 태우고 앞장서라고 하게."

"에이, 뭐 그렇게 까지야...."

"그럼 너 혼자 찾을 수 있어?"

"......."

 

 

지나가는 시골처녀 앞에 차를 세우고 상황을 설명한 뒤 차에 태웠다.

아무리 심성 착한 사람들이 사는 필리핀이라도

도시 같으면 쉽지 않은 상황이었을 것이다. 시골은 이래서 마음에 든다.

 

 

시골처녀 이름은 로나. 19살.

고등학교는 제법 큰 도시에서 다니고 졸업 후 고향으로 내려와

집안 일도 돕고 가게 일도 돕는다고 했다.

한마디로 그냥 집에서 쉰다는 뜻이다.

시골처녀답지 않게 영어도 유창하고 깔끔하게 잘했다.

 

 

차에 탄 로나의 안내로 어렵지 않게 해변에 도착했다.

마침 로나의 이모가 운영하는 리조트도 안내받아 그곳 식당에 자리잡고

여태 먹지 못한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다.

나무기둥과 열대나무 잎으로 엮어 만든 지붕,

그리고 그곳에서 보이는 바다가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밥이나 먹자구. 참? 아가씨는?"

 

 

아직 안 먹었단다. 이 사람들은 이런 데서는 참 솔직한 사람들이다.

특히 배고프다는 말도 참 잘하는데

이 대목은 한편의 주제를 만들어도 모자랄 만큼

다양한 생각을 하게 하는 대목이다.

 

아무튼 로나도 자리잡고 앉아서 크리스와 셋이서 같이 밥을 먹었다.

이 정도 좋은데 안내해 줬으니 식사 정도는 대접하는게

우리나라 사람들의 같은 생각이리라.

설령 밥을 먹었다 해도 무조건 같이 먹어야 하는 것도 우리식 정서다.

 

 

"저 앞에 있는 섬은 뭐지?"

 

 

멀리 작은 섬이 보인다.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아주 작은 섬이다.

로나는 그냥 섬이라고 싱거운 대답을 한다.

사람이 사는 곳이냐 물으니 로나의 답이 걸작이다.

 

 

"인어 정도는 살지 몰라."

"......!"

 

 

외국 여행을 다니며 느끼는 것 중 한가지.

재미있는 곳, 여행지로 적당한 곳은

치안이 좋거나 볼거리가 많은 곳이 아니라 바로 유머가 통하는 곳이다.

이것은 경제력과도 관련이 없다.

나는 어디를 가든 유머가 통하는 곳이면 좋다. 그게 사람 사는 곳이다.

그런 면에서 필리핀이란 나라는 여행하는데 최고의 조건을 갖춘 셈이다.

생활의 경제적 여유에 비해 유머가 이렇게도 잘 통하는 나라는 찾기 힘들 것이다.

 

 

"그럼 가야지. 로나, 이왕 수고하는 거 배 좀 구해줄 수 있어?"

"......?"

 

 

로나는 정말 갈 거냐고 몇 번을 되묻는다.

당연히 간다니까 이왕이면 가격이 싼 배를 알아보겠다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씩씩하고 활달하다. 성격도 밝고 투명하다.

이런 바다를 매일 보며 사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잠시 후 로나는 어딜 다녀왔는지 땀에 흠뻑 젖었다.

자기가 알고 있는 배는 이미 예약이 되어 있고

다른 배는 큰 배라 가격이 비싸다고 한다.

리조트 주인인 로나의 이모는 조금 더 섬에 가까운 해안으로 접근하면

배가 많을 거라 귀띰해주었다.

 

 

"크리스, 가자!"

"정말 가자고?"

"응."

"로나는?"

"특별한 일 없으면 같이 가지?"

 

 

로나는 '특별한 일' 이라는 데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듯했다.

가만히 보니 별로 할 일이 없는 시골 처녀다.

그러니 특별한 일이 있을 리 없고, 특별한 일이 없는데 따라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로나도 따라나섰다.

그 섬은 페스카도르(PESCADOR)라는 섬인데,

다이버들이 매우 좋아한다고 들었다.

접시를 바다에 엎어놓은 것 같은 모양의 작은 무인도다.

그렇게 모알보알에서의 일정을 마쳤다.

 

 

* * *

 

 

모알보알 일정에 있어 로나의 역할은 상당히 컸다.

여행에 있어 가장 소중한 기억을 남겨주는 것은 멋진 자연풍광이 아닌

사람과의 만남이다.

그런 점에서 로나는 그 역할을 너무도 충실히 했고

내게는 아주 소중한 기억을 안겨준 셈이다.

 

 

영어 잘 하고 씩씩한 시골처녀 로나가 앞으로 어떻게 자랄 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자랐으니 어떤 일을 해도

그 순수함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제법 친해진 로나에게 근처 기념품 가게에서

작은 기념품 티셔츠를 선물했다.

그리고 이메일 주소가 적힌 명함을 내밀었다.

 

 

"인터넷이 뭔지 알지? 지금은 이곳에서 사용하기 힘들겠지만

분명히 언젠가는 로나도 인터넷을 이용하게 될 거야.

요즘 세상은 인터넷 없이 아무 일도 되지 않거든?

아마 일년 이내에 이메일이란 것도 사용하게 될 거야.

그때 나한테 첫 번째로 메일을 보내야 해."

 

 

나름대로 똘똘한 로나는 내 말 뜻이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었다.

하지만 로나가 계속 이곳에 머문다면 인터넷을 이용해 메일을 보내는 일은

금방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안타깝지만 이것은 현실이다.

오히려 하루종일 인터넷을 하며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이

로나의 눈에는 더 측은하게 보일 지도 모른다.

모알보알을 떠나는 내가 로나에게 바랄 수 있는 것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 이 아름다운 바다와 함께 자랐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달라는 사실 뿐이다.

 

 

 

그렇게 여행자는 다른 장소로 떠난다.

작은 만남과 작은 이별도 당연히 벌어지는 자연스러운 삶의 한 부분이다.

여행은 작은 삶이다.

 

 

 

 

   

 

 

배를 찾아 바닷가를 누비고 있는 로나. 이모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비롯,

나름대로 장사 좀 해줬다(?).

 

 

 

 

정면에서 잘 나온 사진들도 많지만

왠지 이 아가씨는 이런 분위기가 어울린 듯싶다.

씩씩한 시골처녀 로나가 훌륭한 어른이 되기를 바라며.....

 

 

 

 

 

 

그리고...............

 

 

 

 

 

 

일정 내내 고생하고 친하게 지냈던 택시기사 크리스. 옆에 나도 있었는데 짤렸다^^

너도 한번 봐야 할텐데......

 

 

 

 

 

2006년 필리핀 세부섬 남서쪽 해변 모알보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