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기다린 일전이었지만 경기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바로 전게임이 일본과 벨기에의 경기였고
그 경기가 끝나고 약 30여분의 여유밖에 없었는데도 후배 돌탱이가
현장분위기를 보자고 대학로로 나서길 재촉한 때문이었다.
먹기 힘든 포도를 쳐다보며 '저 포도는 실 거야'라고 말한
여우의 교훈도 모르는 지 괜한 길을 나섰다 고생만 하고
금싸라기 같은 전반을 제대로 못본 것이다.
그러나 경기 내용이 뭐가 중요하랴. 이렇게 모두가 기뻐하는데.
사람들이 기쁜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경기를 내내 압도해서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는,
찜찜한 1승이 아니라 확실한 1승이라는 데서 오는 후련함 때문이다.
나는 얼마전 성남에서 열린 폴란드와 성남의 평가전을 보며
폴란드의 큰 체격조건과 제공력에 내내 불안해 했다.
하지만 이날 경기에 홍명보를 축으로 한 우리 수비진영은
조금도 체력에서 밀리지 않았고 제공력 또한 폴란드에 앞섰다.
그러한 든든한 수비력은 통쾌한 승리를 얻는데 가장 큰 원인이었다.
단지 월드컵에서의 1승만이 아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기뻐서 어쩔줄 몰라하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가장 자연스럽게 1승에 도달했다는 점이다.
이 경기에 앞서 중국과 일본의 1차전이 각각 있었다.
중국은 같은 조의 최약체로 평가받는 코스타리카에 2:0 완패,
일본은 16강의 첫 관문인 벨기에에 2:2 무승부.
일본 언론에서는 다 잡았던 경기를 비겼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일본은 벨기에를 압도하지 못했다. 다만 환순간 리드했던 시간이 있었을 뿐이다.
홈경기의 잇점을 배제하고 본다면 오히려 벨기에보다 못하면 못했지
잘하지 않은 경기다. 결국 무승무로서 그나마 선전한 셈이다.
반면에 우리는 이겼다. 이것이 순서다.
우리보다 일본이 먼저 월드컵에서 1승을 거둔다면
그것은 단지 나의 속좁은 성격 때문이 아니라 축구라는 세상사의 축소판이
비상식적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이 두렵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불가리아는 4강에 올라 세계를 놀라게 했다.
축구를 못하는 나라는 아니지만 불가리아는 유럽의 1등 수준이 아니다.
그러니 더더욱 세계 4강의 실력은 아닌 것이다.
불가리아가 독일, 잉글랜드, 네덜란드, 프랑스, 이태리 보다 잘한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러나 나는 그 대회에서 불가리아의 4강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회 이전까지 불가리아가 월드컵에서 거둔 성적은 16전 6무 10패.
열여섯번의 경기를 치루면서도 단 1승을 못거둔 팀이다.
그러나 그 치열한 유럽예선을 번번히 거치며 월드컵에 도전한다.
그러한 노력의 산물이 1승으로, 그리고 4강으로 나타난 것이다.
우리도 지금의 1승이 거두어지기까지의 월드컵 성적은 14전 4무 10패.
이제 1승을 할 때가 된 것이다.
아시아의 얇은 실력은 개최국의 잇점으로 상쇄했으니
15전만의 1승은 매우 자연스럽다.
세상은 세상의 섭리대로 움직여야 한다.
그것이 더 정당하고 기쁘고 가슴이 벅찬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먼저 1승을 올린데에 대해
속좁은 생각일지는 몰라도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일본도 그동안의 노력과 투자가 있으니
1승을 올리는 시간은 매우 짧아질 것이다.
이날 후반에 교체로 출장한 안정환 선수는 멋진 플레이를 보여줬음에도
득점에 성공하지 못했다. 좋은 찬스에서도 흥분한 모습이 느껴진다.
지난달 스코틀랜드와의 평가전에서 보여준
환상적인 슈팅의 침착함이 어디로 간걸까?
이날 득점은 황선홍, 유상철이 올렸다.
안정환이 득점을 하면 아직은 안되는 것이 또한 세상의 이치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제 안정환도 곧 득점에 성공하게 될 것이다.
월드컵 1승의 일등공신은 누구일까? 히딩크? 홍명보? 아니다.
바로 온 국민이 빨간 옷을 입고
부산 월드컵 구장을 물들인 바로 그 정성과 염원이다.
그것이 바로 1승의 원동력이다.
지난 1990년 이태리 월드컵을 앞둔 북중미 예선.
무승부만 해도 본선에 오를 수 있던 트리니다드 토바코는
미국과의 마지막 경기를 홈경기로 치룬다.
한낮에 벌어진 이 경기에서 온 관중이 자국팀의 유니폼과 같은 색상인
붉은 옷을 입었다.
한낮의 태양 아래 지붕도 없는 경기장에서 반사되는 그 붉은 유니폼이
어찌나 강렬한 지 온 세상이 붉게만 보였다.
그리고 그런 장면을 처음본 나는 매우 경악했다.
그런 경기장에서는 누구도 홈팀을 이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경기는 미국이 1:0으로 이겼다.
도저히 이길 것 같지 않은 분위기인데 어째서 미국이 이겼을까?
나는 그점이 오랫동안 궁금했다. 그러나 오늘에서야 답을 찾았다.
트리니다드 토바코의 관중석은 무늬만 강렬했지
이기고자 하는 염원이 부족했다는 답을 찾은 것이다.
이날 우리는 분명히 달랐다.
경기장이 아니라 전국의 어느 곳에서도 모두 붉은 옷이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경기장을 붉게 물들이면 상대선수들이 주눅이 드는 응원효과라도 있다지만
집에서 TV를 보는 사람이, 거리에서 TV를 보는 사람이 붉은 옷을 입는 것이
경기의 승패에 무슨 관계가 있을까.
하지만 분명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이날 알게 되었다.
그런 염원이 모듀 경기장에서 선수들의 움직임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말이다.
비록 경기장엔 가지 못하고 다른 행사장에서 결국 못갔지만
붉은 옷을 입고 TV를 보는 내마음도 진한 카타르시스속에 젖어 든다.
이게 축구의 힘이다.
어느 스포츠신문 해설위원이 있다.
야구를 편애하기로 유명한 이 위원은 박찬호 선수가 메이저 리그에서 1승을 하는 날,
흥에 겨워 '메이저리그 1승은 월드컵 1승과 맞먹는 쾌거'라고 신문을 통해 발표했다.
이말은 곧바로 네티즌들의 논란의 대상으로 떠올라 호된 고생을 했다.
오늘 뉴스에서 보니 광화문에만 15만의 인파가 모였다고 한다.
나도 가려했지만 이미 현장에 있던 사람들에게 들려온 소식은
북새통 그 자체라고 했다.
광화문 지하철역은 기차가 정차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지난 2000년의 새날을 앞두고 벌어진 '밀레니엄 행사'에 모인 군중이 20만이었니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행선지를 대학로로 바꾸었지만 대학로의 전철역도 정차하지 않았다.
아니 정차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몰렸다.
이게 월드컵 1승이다.
이렇게 목말라하고 이렇게 애원하고,
그리고 48년이 걸려서야 겨우 얻은 월드컵 1승이다.
도대체 축구가 뭐고 월드컵이 뭐길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애를 태웠는가.
정답은 아무도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직도 축구를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16강에 간다면 목표달성을 했다고 축구가 의미가 없어질까?
그렇다면 독일이나 브라질, 이태리는 월드컵에 여러번 우승했으니
축구를 보려는 아무 미련도 없어야 한다.
그러나 어디 그런가. 그래도 죽기살기로 이기려 하지 않나. 이게 바로 축구다.
이렇듯 힘들게 얻은 첫승이지만 이제 그 감격은 곧 잠재우고
우리는 또 다른 목표를 향해 노력해야 한다.
온 국민과 함께 나 역시 한국축구의 월드컵 첫승에 열렬히 환호한다.
그리고 비록 상대방이지만 뛰어난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폴란드의 예지크 두덱 골키퍼에도 경의를 표한다.
나는 그가 세계 최고의 골키퍼라는 것을 인정한다.
아하누가
글을 쭉 읽어보니 폴란드 골키퍼 두덱을 무척 좋아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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